[취재여록] 예비판사는 왜 없앴을까

"제 이름을 걸고 판결을 내린다고 하니 책임감이 더 느껴집니다."

1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법원 본관 대강당.신임 법관 임명식을 마치고 나오는 박모 판사(30)가 담담하게 소회를 밝혔다.최근 예비판사제가 폐지되면서 이날 부로 예비판사라는 '꼬리표'를 떼고 정식 법관으로 임명된 그에게 가족들까지 찾아와 축하의 뜻을 전했다.

하지만 그는 시종 진중함을 잃지 않았다.

예비판사에서 법관으로의 전환.여기에는 우선 헌법과 법률에 의해 신분이 보장된다는 뜻이 담겨있다. 법관은 탄핵이나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지 않는 한 법관 신분을 유지할 수 있다.최소 10년 임기도 보장된다.

판사들에게는 앞으로 판결문에 본인의 이름을 남기는 것이 가장 크게 와닿는 모양이다.

박 판사만 해도 1년3개월간 예비판사로 있으면서 사실상 재판에 참여했지만 '이름없는' 판사였다.박 판사와 함께 이날 정식으로 임명장을 받은 판사는 총 181명.이들 중에는 3개월 만에 예비판사 생활을 접은,운좋은(?) 판사도 상당수 있었다.

예비판사 제도는 1994년 처음 도입됐다. "사회경험이 사실상 전무한 나이 어린 법관이 뭘 알겠느냐"는 재판에 대한 불신여론을 잠재우기 위해서였다. "예비판사 생활을 적어도 7년은 거쳐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나온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타협안으로 기간이 2년으로 단축됐지만 이마저도 제도 도입 13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예비판사 제도를 폐지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재판수요에 비해 법관 수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 이용훈 대법원장도 이날 임명장을 수여하면서 "늘어난 재판역량을 민사재판에 집중시킴으로써 일선 법관들의 업무 부담을 다소나마 덜게 되었다"고 흡족해했다.

하지만 지금도 20대 나이의 판사가 적지 않다.

특히 여판사 비율이 높아지면서 판사의 평균 나이도 낮아지는 추세다.예비판사제 도입 당시의 문제점은 여전히 남아있다는 얘기다. 오히려 구술재판주의가 강화되면서 법관의 임무는 더 막중해졌다. 법정에서의 심리가 중요해질수록 법관의 자질과 경륜이 더욱 요구되기 때문이다. 땜질처방식 예비판사제 폐지가 우려되는 이유다.

김병일 사회부 기자 k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