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갤러리] '도장골 시편-입하 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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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로들이 햇솜처럼 부풀었다가 가라앉는다
긴 잠을 깬 봄의 들녘을 철벅철벅 걸어가는뿔 없는 소의 그림자 뒤에서 백로들이 목화 꽃밭처럼 피었다가 내려앉는다
내려앉아 들밥을 먹는다
소풍 나온 듯 푸르게 푸르게 들밥을 먹는다백로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불도저가 무논을 썰고 지나가면
땅 속에 숨어 있던 미꾸라지며 땅강아지들이 놀라 몸을 일으킨다는 것을불도저 또한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어미처럼 먹이를 물어다 주는 부리라는 것을
하지만 알고도 모르는 척 짐짓 뒷짐 지고 저만큼 걸어가는 것이다걸어가,무뚝뚝한 손길로 제 새끼 머리를 쓰다듬듯 논바닥만 고르고 있는 것이다.
(…)
백로들이 다시 하얗게 부풀었다가 가라앉는다(…)
-김신용 '도장골 시편-입하 부근' 부분
백로와 불도저의 행복한 만남을 여기에서 본다.
무논 썰고 지나간 불도저가 백로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어미가 됐다.
굉음을 내며 산하를 뭉개버리는 흉물로만 여겨졌던 불도저의 놀라운 변신이다.초록으로 출렁이는 오월의 들녘,목화꽃처럼 내려앉는 백로들,제 새끼 머리 쓰다듬듯 논바닥 고르고 있는 불도저….개발과 파괴로 신음하는 이 시대,이 땅에도 이런 꿈같은 풍경이 있다니.그런 풍경을 잡아낸 시인의 눈이 경이롭다.
이정환 문화부장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