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심원의 판단은 언제나 옳을까?
입력
수정
내년부터 일반 국민이 살인·뇌물 같은 일부 중범죄 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여한다.
'국민의 형사재판 참여에 관한 법률'이 최근 국회를 통과하면서 53년 만에 사법 민주주의가 한 단계 성숙되는 계기가 마련됐다는 평가다.비록 배심원의 결정은 판사가 반드시 따르지 않아도 되는 '권고형 효력'에 그치지만 재판부가 심리적인 압박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유전무죄나 전관예우 논란 등 사법 불신도 크게 줄어들 전망이다.
그러나 배심제는 영국 미국 등 선진국이 최소 100여년에서 수백년의 시행착오를 거친 제도다.따라서 당장 우리가 배심제의 어떤 부작용과 맞닥뜨릴지 걱정되는 측면도 적지 않다.
외국 영화를 통해 본 배심제의 허점을 우리 현실과 비교하며 유추해 보자.
#1. 비법률가들의 집단적 오류,과연 없을까흑인 차별이 심했던 미국 남부 미시시피.흑인 소녀가 백인 건달 2명에게 강간과 끔찍한 폭행,고문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리고 KKK(백인우월주의를 내세우는 극우비밀결사)가 만연한 시대 상황에서 뻔뻔한 범인들을 향해 이 소녀의 아버지는 재판이 진행되는 법정에서 기관총을 난사한다.
법정에서 배심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벌어진 살인사건이다.명백한 증거와 증인들.그러나 배심원단(모두 백인)은 이 흑인 아버지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만약 자신들의 어린 딸이 이 같은 범죄의 피해자가 됐다면 부모로서 제정신을 가질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는 변호사(매튜 매커너히 분)의 설득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미국 작가 존 그리샴의 첫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법정 영화 '타임 투 킬'(1996)의 줄거리다.
이 영화는 인종차별이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는 흑인들의 억울함을 대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집단적 온정주의가 재판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톨스토이의 소설을 기초로 한 영화 '부활'(1958)에서 나타난 카추샤의 소송은 반대의 경우다.
사생아로 태어나 어린시절 임신한 몸으로 남자로부터 버림받은 카추샤 마슬로바는 사악한 여관 고용인들의 간계에 빠져 부유한 상인 스멜리코프를 독살했다는 살인죄를 뒤집어쓴다.
그러나 매춘부로 전락해 버린 그녀의 모습을 대하는 배심원단의 편견과 시선은 냉정하기만 하다.
비록 나중에 판결은 번복되지만 배심원단의 집단적인 분노는 결국 카추샤를 시베리아로 보내고 만다.
#2. 리더의 등장,득인가 실인가
배심원들의 평결은 다수의 배심원 간 토론과 합의를 통해 도출된다.
그러나 살아온 환경과 지적 수준이 다른 여러 사람이 모이게 되면 분위기를 주도하는 1~2명의 '보이지 않는' 리더가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토론문화가 익숙하지 않은 사회에서는 소수의 의견이 주도적인 목소리에 묻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재판 영화의 고전으로 꼽히는 '성난 12인'(1957)에선 이런 징후를 찾아볼 수 있다.
11명의 백인과 1명의 히스패닉계 배심원은 살인 혐의로 기소된 푸에르토리코 청년의 유·무죄를 가리게 된다.
증인과 증거들이 하나같이 청년에게 불리하다.
무죄와 유죄를 지지하는 배심원단의 예비투표 결과는 무려 1 대 11.유죄 평결이 내려지면 이 청년은 전기의자로 직행하게 된다.
그러나 유일한 반대자였던 중년의 건축기사(헨리 폰다 분)가 나서면서 상황은 180도 달라진다.
그는 증언들의 허점과 배심원들의 편견을 짚어내면서 이들을 설득,무죄 평결을 이끌어 낸다.
12명의 배심원을 두는 미국과 달리 국내에서는 법정형이 사형이나 무기징역,무기금고인 중대사건의 경우 9명을,그밖의 사건에서는 7명의 배심원을 두도록 하고 있다.
배심원의 규모가 작을수록 다양한 의견이 대두되기보다 한두 사람에 의한 설득이 더 위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크다.
#3. 배심원과 소송 관계인의 접촉은 불가능할까
무명 조각가이며 한 아이의 엄마인 애니 레이드(데미 무어 분)는 법원으로부터 마피아 보스인 보파노의 살인 혐의 재판에서 배심원으로 봉사해 달라는 통지를 받는다.
마침 그의 인생에 한 남자(알렉 볼드윈 분)가 다가온다.
거액의 현금으로 애니의 작품을 사들이는 미술품 수집가로 지적이고 따뜻한 남자.잠시 사랑의 감정에 마음이 설렌다.
그러나 그 남자는 보파노의 측근으로 결국 배심원인 애니를 위협해 보파노가 무죄임을 평결내리도록 협박하게 된다.
영화 '주어러'(1996)의 줄거리다.
피고인 측 변호사가 비우호적인 성향의 배심원들을 거부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회유·협박하거나 금품 공세를 펼칠 우려가 대두된다.
특히 배심원이 지방법원의 관할 구역 내 20세 이상 국민 중에서 선정되기 때문에 소규모 지역의 경우 배심원의 신분이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
국토가 넓은 미국에 비해 '배심원 풀(pool)'이 작을 수밖에 없는 것도 한계다.특히 '한두 사람만 건너면' 배심원의 가족이나 친지 등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될 수 있다면 접촉과 회유는 아주 불가능한 얘기가 아니다.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
'국민의 형사재판 참여에 관한 법률'이 최근 국회를 통과하면서 53년 만에 사법 민주주의가 한 단계 성숙되는 계기가 마련됐다는 평가다.비록 배심원의 결정은 판사가 반드시 따르지 않아도 되는 '권고형 효력'에 그치지만 재판부가 심리적인 압박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유전무죄나 전관예우 논란 등 사법 불신도 크게 줄어들 전망이다.
그러나 배심제는 영국 미국 등 선진국이 최소 100여년에서 수백년의 시행착오를 거친 제도다.따라서 당장 우리가 배심제의 어떤 부작용과 맞닥뜨릴지 걱정되는 측면도 적지 않다.
외국 영화를 통해 본 배심제의 허점을 우리 현실과 비교하며 유추해 보자.
#1. 비법률가들의 집단적 오류,과연 없을까흑인 차별이 심했던 미국 남부 미시시피.흑인 소녀가 백인 건달 2명에게 강간과 끔찍한 폭행,고문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리고 KKK(백인우월주의를 내세우는 극우비밀결사)가 만연한 시대 상황에서 뻔뻔한 범인들을 향해 이 소녀의 아버지는 재판이 진행되는 법정에서 기관총을 난사한다.
법정에서 배심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벌어진 살인사건이다.명백한 증거와 증인들.그러나 배심원단(모두 백인)은 이 흑인 아버지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만약 자신들의 어린 딸이 이 같은 범죄의 피해자가 됐다면 부모로서 제정신을 가질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는 변호사(매튜 매커너히 분)의 설득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미국 작가 존 그리샴의 첫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법정 영화 '타임 투 킬'(1996)의 줄거리다.
이 영화는 인종차별이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는 흑인들의 억울함을 대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집단적 온정주의가 재판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톨스토이의 소설을 기초로 한 영화 '부활'(1958)에서 나타난 카추샤의 소송은 반대의 경우다.
사생아로 태어나 어린시절 임신한 몸으로 남자로부터 버림받은 카추샤 마슬로바는 사악한 여관 고용인들의 간계에 빠져 부유한 상인 스멜리코프를 독살했다는 살인죄를 뒤집어쓴다.
그러나 매춘부로 전락해 버린 그녀의 모습을 대하는 배심원단의 편견과 시선은 냉정하기만 하다.
비록 나중에 판결은 번복되지만 배심원단의 집단적인 분노는 결국 카추샤를 시베리아로 보내고 만다.
#2. 리더의 등장,득인가 실인가
배심원들의 평결은 다수의 배심원 간 토론과 합의를 통해 도출된다.
그러나 살아온 환경과 지적 수준이 다른 여러 사람이 모이게 되면 분위기를 주도하는 1~2명의 '보이지 않는' 리더가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토론문화가 익숙하지 않은 사회에서는 소수의 의견이 주도적인 목소리에 묻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재판 영화의 고전으로 꼽히는 '성난 12인'(1957)에선 이런 징후를 찾아볼 수 있다.
11명의 백인과 1명의 히스패닉계 배심원은 살인 혐의로 기소된 푸에르토리코 청년의 유·무죄를 가리게 된다.
증인과 증거들이 하나같이 청년에게 불리하다.
무죄와 유죄를 지지하는 배심원단의 예비투표 결과는 무려 1 대 11.유죄 평결이 내려지면 이 청년은 전기의자로 직행하게 된다.
그러나 유일한 반대자였던 중년의 건축기사(헨리 폰다 분)가 나서면서 상황은 180도 달라진다.
그는 증언들의 허점과 배심원들의 편견을 짚어내면서 이들을 설득,무죄 평결을 이끌어 낸다.
12명의 배심원을 두는 미국과 달리 국내에서는 법정형이 사형이나 무기징역,무기금고인 중대사건의 경우 9명을,그밖의 사건에서는 7명의 배심원을 두도록 하고 있다.
배심원의 규모가 작을수록 다양한 의견이 대두되기보다 한두 사람에 의한 설득이 더 위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크다.
#3. 배심원과 소송 관계인의 접촉은 불가능할까
무명 조각가이며 한 아이의 엄마인 애니 레이드(데미 무어 분)는 법원으로부터 마피아 보스인 보파노의 살인 혐의 재판에서 배심원으로 봉사해 달라는 통지를 받는다.
마침 그의 인생에 한 남자(알렉 볼드윈 분)가 다가온다.
거액의 현금으로 애니의 작품을 사들이는 미술품 수집가로 지적이고 따뜻한 남자.잠시 사랑의 감정에 마음이 설렌다.
그러나 그 남자는 보파노의 측근으로 결국 배심원인 애니를 위협해 보파노가 무죄임을 평결내리도록 협박하게 된다.
영화 '주어러'(1996)의 줄거리다.
피고인 측 변호사가 비우호적인 성향의 배심원들을 거부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회유·협박하거나 금품 공세를 펼칠 우려가 대두된다.
특히 배심원이 지방법원의 관할 구역 내 20세 이상 국민 중에서 선정되기 때문에 소규모 지역의 경우 배심원의 신분이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
국토가 넓은 미국에 비해 '배심원 풀(pool)'이 작을 수밖에 없는 것도 한계다.특히 '한두 사람만 건너면' 배심원의 가족이나 친지 등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될 수 있다면 접촉과 회유는 아주 불가능한 얘기가 아니다.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