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인연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이름 하나가 시린 허공을 건너와 메마른 내 손등을 적신다.' 김용택씨의 시 '첫눈'이다.

첫눈엔 이처럼 그리운 인연을 떠올리게 하는 힘이 있다.첫눈이 내리면 삶의 더께에 파묻힌 아름답고 순수했던 시절이 떠오르고,팍팍하고 삭막해진 마음엔 한줄기 따스한 바람이 분다.

김재순 전 국회의장(84·샘터사 고문)은 25일 작고한 피천득 선생(97·서울대 명예교수)과 30여년 동안 첫눈이 오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전화기를 들었다고 했다.

김 고문은 이 얘기를 하면서 소년처럼 해맑게 웃었다.아름다운 인연이다 싶었다.

나이 들어 첫눈 소식을 주고 받을 사람이 있다는 건 부러웠다.

수필집 '인연'이 피 선생 나이 80대 중반에 샘터사에서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된 것도 이런 인연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인연'은 17살 때 처음 만난 하숙집 딸에 관한 글이다.

훗날 결혼한 여인을 찾은 순간을 그는 이렇게 적었다.

'마주친 것은 백합같이 시들어가는 아사꼬의 얼굴이었다.아사꼬와 나는 절을 몇 번씩 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글은 이렇게 이어졌다 '그리워하는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꼬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누구나 한번쯤 겪을 법한 일을 담담하면서도 절실하게 담아내서였을까.

글은 폭넓은 공감을 얻었다.

그는 또 5월을 사랑했다.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나는 오월 속에 있다.'

계절과의 남다른 인연인가.

5월에 태어난 그가 5월에 떠나갔다.

정갈한 글만을 남긴 채.우리 모두 수많은 인연 속에 살아간다.

잠시 스쳤으나 인생을 바꾼 인연도 있고,긴 세월 고운 인연도 있고,끊을 수 없는 질긴 인연도 있다.

흔히 운명이라지만 인연을 만드는 건 자신이다.아름다운 인연을 위해 우리 모두 얼마나 노력하는지 돌아볼 일이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