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꼭 그 자리'에 있는 것들

정끝별 < 시인ㆍ명지대 교수 >

이홍섭 시인의 시 '터미널'은 이렇게 시작한다."젊은 아버지는/ 어린 자식을 버스 앞에 세워놓고는 어디론가 사라지시곤 했다/ 강원도 하고도 벽지로 가는 버스는 하루 한 번뿐인데/ 아버지는 늘 버스가 시동을 걸 때쯤 나타나시곤 했다.' 젊은 아버지는 어린 자식에게 이렇게 이르고 핑하니 사라지셨을 게다. "어디 가지 말고,꼭 이 자리에 서 있어라".버스는 곧 출발할 것만 같은데 아버지는 오지 않고,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도 같은,그 간당간당한 기다림이 어린 아들에게는 얼마나 길었을까.

"네 엄마가 뒷마루에 앉혀놓고 '여기에 꼭 있어라'이르고는 집안일 보고 집밖 설거지까지 다 하고 와도 맨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느니라." 어렸을 적 얘기를 해달라고 조르는 내게 할머니가 해주셨던 말씀이셨다.

텃마루 끝으로 늘어뜨린 두 다리를 흔들며,누군가가 다가와 '여기 꼭 있어라'라는 주문을 풀어줄 때까지 하염없이 그 자리 꼭 앉아 있었을 어리디어린 나를 생각하는 일은 어쩐지 가슴 먹먹한 일이다.서울로 갓 전학 왔던 초등학교 3학년때쯤이었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잠시 가파른 언덕에 살았다.

그날은 김장을 시작하는 날이었고 전날의 갑작스런 눈과 추위로 언덕은 얼어 있었다.김장거리를 가득 실은 수레를 끌고 가던 아저씨는 더 이상 못 올라간다며 배추 등속을 언덕 아래에 부려놓고 가버렸다.

배추 등속과 나를 번갈아 보며,엄마는 어린 내게 일렀다.

'여기 꼭 서 있어라'.엄마가 배추 한 더미를 머리에 이고 올라간 지 참,참,오래.뼛속까지 새파랗게 언 채 오줌 찔끔 눈물 찔끔을 훔칠 즈음에서야 내려온 엄마는 "미련하기는,추우면 그냥 올라와야지"하며 오히려 역정을 내셨다.

종종 그 춥고 막막했던 기다림을 떠올려 볼 때가 있다.

"어디 가지 말고,꼭 이 자리에 서 있어라"라는 당부로부터 30,40년이 지난 지금, 늙은 아버지를 서울행 버스 앞에 세워놓고 중년이 된 시인이 이제는 핑하니 사라지곤 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시를 끝맺고 있다.

"커피 한 잔 마시고,담배 한 대 피우고/ 벌써 버스에 오르셨겠지 하고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그 자리에 꼭 서 계신다/ 어느새 이 짐승 같은 터미널에서/ 아버지가 가장 어리셨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잘 기다리고 잘 돌아왔으니.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을 것이다.

기다리게 하는 자와 기다리는 자.기다림을 당부하는 자는 허덕이며 바쁜 자이고,믿음을 반석 삼아 기다리는 자는 기다리는 일 이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는 자이다.

세워놓는 자와 세워진 자 모두에게 '꼭 그 자리'는,세상 한복판에 서 있는 등대일 것이다.

약속의 자리이자 사랑의 자리일 것이다.

그러나 때로 '꼭 그 자리'는 배반의 자리이기도 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꼭 그 자리'에 돌아오지 않았고 또 돌아오지 못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꼭 그 자리'를 눈물로 메우며 하염없이 기다렸으며,혹시 하는 마음으로 오고 또 와보았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텅 비어버린 '꼭 그 자리'에서 헤매고 헤맸을까.

그러므로 누군가를 '꼭 그 자리'에 세워둔다는 것,그것은 바람처럼 문득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스스로를 붙잡아두기 위해 '꼭 그 자리'에 대못을 박는 일인지 모른다.

그렇게 꼭 돌아와야 할 지점을 신표(信標)처럼 간직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다리는 것밖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리디어린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기다림을 당부하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새기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짐승 같은 터미널의 세상에서.

아침마다 현관이라는 '꼭 그 자리'에서 주고받는 '다녀오겠습니다''다녀오마'라는 말을 생각한다.'꼭 그 자리'를 꼭지점으로 들고나는 눈물겨운 사람들! 사건과 사고,모략과 배반이 얼룩진 아침 신문을 읽으며 '꼭 그 자리'의 약속과 '꼭 그 자리'의 믿음과 '꼭 그 자리'의 기다림과 '꼭 그 자리'의 사랑을 생각해보는 아침이다.

'꼭 그 자리'가 비단 집안에만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