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화이트 셔츠와 어머니

鄭潤基 < 패션스타일리스트 intrend07@yahoo.co.kr >

중학생이 되면서 처음 입게 된 화이트 셔츠는 반들반들 윤이 나는 나일론 소재였다.1년 365일 중 300일은 입고 다닌 내 첫 화이트 셔츠가 정겹고 소중해 애지중지했던 기억이 난다.

군더더기 없는 심플함이 정직해 보였고,잘 다림질된 순백의 셔츠가 강직해 보여 어른이 되면 화이트 셔츠만 입겠다고 다짐했었다.

어린 시절 그런 생각 때문인지 아직도 나는 화이트 셔츠에 대한 환상이 있다.내 직업은 패션 스타일리스트다.

스타일리스트 일과 패션브랜드 홍보 일을 함께 하고 있다 보니 최첨단 트렌드의 중심에 서 있게 된다.

시즌마다 변하는 트렌드와 그에 맞춰 쏟아져나오는 수많은 의상 속에서,언제나 트렌디해야 하고,세련되어야 하며,특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마저 생겼었다.그러나 이제 나이가 조금 들어 여유를 갖고 보니 내게 편한 옷이 남이 보기에도 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촌스러운 듯 순박한 것도 매력적일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트렌드와는 상관없을 것 같은 화이트 셔츠가 큰 힘을 가진다는 것도 이론이 아닌 마음으로 깨닫게 되었다.흰 셔츠 하나가 가지는 힘은 실로 대단하다.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다른 옷들을 서로 어울리게 하고 돋보이게 해주는 화이트 셔츠는 묵묵히 인내하는 어머니를 생각하게 한다.

한결같은 정갈함과 몸에 밴 검소함으로 남편을 빛나게 하고 자식을 빛나게 했던 어머니.개구쟁이 막내아들이 더럽혀놓은 교복 셔츠를 소맷단이며 목 둘레며 꼼꼼히 세탁하고 쨍쨍하게 날이 서도록 다림질해주신 어머니는 흰 셔츠에 대한 환상을 키워주셨다.

그러고보니 예전에는 '화이트 칼라'라고 해서 흰 셔츠를 입은 남자가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들 하지 않았던가.

매일 저녁 아들의 교복 셔츠를 손질하며,어머니는 훗날 성공한 아들의 모습이 떠올라 혼자 흐뭇한 웃음을 지으셨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아들은 자라 어른이 되었고,어머니는 늙어 예전 같지 않지만 그 시절 둘이 나누었던 말없는 교감은 여전하다.

아니 더 강해졌으리라.

지금도 수많은 브랜드에서 다양한 화이트 셔츠를 선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내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어머니가 손수 챙겨주시던 촌스러운 교복 셔츠와 같은 것이다.

간결하고 명쾌한 화이트 셔츠.어린 시절 내 꿈을 키워주고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게 했던 그것.요즘도 잘 손질된 화이트 셔츠를 꺼내 입노라면 주름진 어머니의 얼굴과 철없던 내 어린 시절이 함께 떠올라 묘한 기분에 휩싸이곤 한다.

이번 주말에는 어머니가 좋아하는 수박이라도 한 통 사들고 늘 그 자리에 서 계신 어머니를 찾아 뵈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