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이슈 분석] 떠오르는 금융시장의 '큰 손' 국부펀드

3조弗 넘는 공룡이 움직인다

한번 뒤척일때만다 '쓰나미'고수익 자산에 대규모 투자...치고 빠지면 금융위기 올수도


남아도는 외환이나 '오일머니' 등을 활용해 고수익을 노리는 '국부(國富)펀드(sovereign wealth fund)'가 금융시장의 최대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투자 규모 면에서 비교 대상을 찾기 어려운 '큰손'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특히 중국 일본 등 외환보유액 1,2위 국가들까지 돈다발을 들고 나서면서 판이 확 커졌다.

고유가로 떼돈을 번 중동 국가들도 소매를 걷어붙였다.

수익만 나면 어디든 투자하겠다는 국부펀드의 적극적인 투자 마인드도 금융시장을 긴장시키는 요인이다.이들이 거대한 몸집을 한번씩 뒤척일 때마다 금융시장엔 '쓰나미'가 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국부펀드는 적정 수준 이상의 보유 외환을 따로 떼어 투자용으로 모아놓은 자금을 말한다.

석유를 수출해 벌어들인 오일달러나 무역수지 흑자로 발생한 외환보유액 등이 주요 자금원이다.보통 전문 투자인력으로 구성된 국가기관이 자금 운용을 담당한다.

공격적인 투자로 이름이 높은 싱가포르투자청(GIC)이 대표적이다.

보유 외환 등이 국부펀드로 옮겨가면 공격적인 성향을 띠게 된다.

일반적으로 중앙은행은 외환보유액을 미국 국채나 이에 버금가는 안전자산에 투자하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국부펀드는 주식 부동산 등 '고위험-고수익' 자산을 좇는다.

국부펀드가 신조어는 아니다.

쿠웨이트는 1950년대부터 일찌감치 '쿠웨이트투자공사(KIA)'라는 기구를 통해 보유 외환의 수익성을 높이는 데 힘을 쏟았고 싱가포르도 GIC와 테마섹이라는 양대 축을 통해 적극적인 투자에 나선 지 20여년이 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국제 금융시장의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규모도 그리 크지 않았고 투자 대상도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재무부로부터 "불과 1년 전만 해도 국부펀드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멘트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 상황이 급변했다.

엄청난 외환보유액을 쌓아놓고 있던 공룡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중국의 가세가 결정타였다.

중국은 1조3000억달러를 웃도는 외환보유액에서 2000억~3000억달러를 헐어 올 9월께 중국투자공사(CIC)를 설립하기로 했다.

한 나라의 현금 투자로는 사상 최대 규모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주도한 원조 계획인 '마셜플랜'도 그간의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더라도 1000억달러에 불과하다.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외환보유액이 많은 일본도 꿈틀대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일본이 싱가포르 테마섹을 모델로 한 국영투자기관 설립 문제를 검토 중이라고 보도했다.

곧바로 일본 정부가 부인하긴 했지만 일본이 9000억달러가 넘는 외환을 그대로 안고 가리라고 생각하는 전문가들은 거의 없다.

어떤 식으로든 보유 외환의 수익성을 높일 방안을 모색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게다가 최근엔 세계 최대 연기금인 일본의 연금투자펀드(1억3470만달러)마저 해외에 투자하라는 요구가 일본 내에서 거세지고 있다.

연 평균 수익률이 고작 3%대에 그치기 때문이다.

이 밖에 세계 5위 외환보유국인 한국도 2005년 7월 한국투자공사(KIC)를 세우고 200억달러의 실탄을 마련했고 한국보다 외환보유액이 조금 더 많은 대만도 '대만판 테마섹' 설립을 검토 중이다.

전 세계 국부펀드 규모는 아직 구체적인 설립 방안이 나오지 않은 일본과 대만 등을 빼더라도 2조5000억달러에 이른다(모건스탠리 추정).원화로 환산하면 2330조원에 해당하는 천문학적인 규모다.

작년 한국 국내총생산(GDP·약 848조원)의 세 배에 달하는 수준이고 전 세계에 돌아다니는 헤지펀드(약 2조달러)보다도 많은 액수다.

이처럼 각국이 국부펀드 설립에 앞다퉈 나서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외환보유액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났기 때문이다.

다우존스에 따르면 아시아 12개국의 외환보유액은 6월 말 기준으로 3조5200억달러에 달했다.

1년 전(2조9200억달러)에 비해 20% 이상 불어난 것이다.

여기엔 중국이 큰 몫을 했다.

중국의 외환보유액은 전년 동기 대비 41.6% 증가한 1조3300억달러로 집계됐다.

올 상반기 늘어난 외환보유액은 2663억달러로 작년 전체 증가분을 이미 넘어섰다.

지나치게 비대해진 외환보유액은 국내 경제에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각국 중앙은행은 무역수지 흑자나 원자재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가 국내에 쏟아지면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대거 사들여 외환보유액으로 쌓게 된다.

자국 화폐의 가치가 급격하게 올라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이 과정에서 많은 유동성이 풀려 인플레이션 압력을 높이는 부작용이 발생한다.

이렇게 불어난 유동성은 금리 인상을 통해 다스리기도 힘들다.

금리를 올리면 외국 투자자본이 더욱 몰려든다.

국내 시장에 다시 달러가 넘치고 이를 흡수하는 동안 자국 화폐가 방출돼 시중 유동성이 오히려 늘어나게 된다는 얘기다.

중앙은행이 특수한 채권(우리나라의 통화안정증권)을 발행해 불어난 유동성을 빨아들이는 정책을 쓰긴 하지만 효과는 제한적이다.

채권 규모가 커지면 덩달아 이자 부담도 늘어나고 이자 형태로 풀린 돈을 흡수하기 위해 다시 채권을 발행해야 하는 악순환에 빠진다.

따라서 어떻게든 국내 시장에 풀린 달러를 해외로 퍼 날라야 한다.

아시아 각국이 국부펀드를 통해 해외투자를 늘리려고 하는 이유다.

외환보유액을 몇 푼 안 남는 미 국채에나 투자하면서 묵혀두기엔 기회비용이 너무 크다는 것도 국부펀드가 인기를 끄는 이유다.

대표적인 국부펀드인 싱가포르의 테마섹은 설립 이후 연 평균 18%의 수익을 올렸고 노르웨이 국부펀드인 '노르웨이 중앙은행 투자운용그룹(NBIM)'은 작년 한 해 17%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각국이 입맛을 다실 만한 실적이다.

국부펀드는 거대한 덩치와 공격적인 투자 성향으로 금융시장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우선 채권시장에는 악재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각국 중앙은행은 외환보유액의 대부분을 미 국채 등 고정수익 자산에 주로 투자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이로 인해 미국 국채 가격이 0.3~1.0%포인트 정도 비싸졌다(수익률 하락)고 추정했다.

하지만 외환보유액이 국부펀드로 이동하게 되면 상황이 바뀐다.

중앙은행들이 보유 자산의 가치를 떨어뜨릴 만큼 국채를 대량으로 내다팔지는 않겠지만 예전만큼 채권 비중을 높게 유지하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채권을 사려는 수요가 줄어 채권값은 떨어질 공산이 크다.

최근 들어 이런 현상은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

미 재무부가 최근 발표한 국채시장 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 정부의 미 국채 보유액은 지난 4월 한 달 동안 58억달러 감소한 것으로 집계됐다.

월간 기준으로 7년래 가장 큰 순매각 규모다.

미 국채 10년물 수익률이 연 5%대로 뛰어오른 결정적 원인이 중국에 있었다는 방증이다.

반면 주식시장은 채권시장에서 빠져나온 자금으로 인해 상승 탄력을 받을 수 있다.

좀 더 공격적인 투자를 하는 국부펀드는 기업 인수·합병(M&A) 시장의 큰손으로 부상할 가능성도 있다.

엔화 가치가 높아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도쿄 증권거래소의 시가총액이 전 세계 증시의 10%를 넘는 만큼 국부펀드가 주식 투자를 늘릴 경우 일본 주식을 편입시키기 위해 엔화를 사들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안재석 기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