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보험산업] (1) 영업기반 위축 … 은행 눈치 안보곤 보험 팔기도 어려워져

"이번에 나온 신상품인데 잘 부탁합니다."(A보험사 K상무)

"그런데 수수료율이 다른 회사보다 낮은 것 같군요.이 정도 수수료로는 판매가 어렵습니다."(B은행 Y부장)

"그럼 수수료를 좀 높여보도록 하겠습니다."(K상무)

K상무는 본사로 돌아와 상품 부서와 협의한 끝에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은행 측 요구대로 수수료를 더 올리기로 했다.방카슈랑스 보험상품의 경우 모집수수료(신계약비)의 80~90%는 은행이 챙기고 나머지 10~20%를 보험사가 가져간다.


K상무는 당초 90%를 제시했다가 95%로 높인 것이다.

그는 "은행 창구에 우리 상품을 진열하려면 무리한 요구를 하더라도 거부할 수 없는 게 현실"이라고 털어놨다.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은행의 '횡포'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수시로 보험사에 예정이율(금리)이 높은 상품을 제공할 것을 요구하기 일쑤다.

금리가 높아야 창구에서 잘 팔린다는 이유에서다.하지만 예정이율이 높으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보험사가 져야 한다.

방카슈랑스에서 잘 팔리는 저축성보험의 경우 대형사의 예정이율은 연 4.8~4.9% 수준이지만 브랜드 인지도가 떨어지는 중소형사들은 연 5.4%에 달한다.

6%를 제시하는 곳도 있다.

한 중소형 보험사 관계자는 "은행들이 금리 입찰을 하는 식으로 상품을 심사하기 때문에 높은 금리를 제시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설 땅 잃어가는 보험사

보험사가 은행의 '시녀'로 전락하고 있다.

매출(신규 보험 판매)의 30% 이상을 은행에 의존하는 방카슈랑스 때문이다.

중소형 보험사 가운데 상당수가 50% 이상을 은행에 의존한다.

보험사 생사여탈의 칼자루를 은행이 쥐고 있는 셈.30여개 보험사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보험 업계에선 은행 '줄'을 잡지 않고선 살아남기 어렵다.

특히 내년 4월 4단계 방카슈랑스 시행으로 종신보험과 자동차보험까지 은행 판매가 허용될 예정이다.

보험업계는 종신보험과 자동차보험은 생보사와 손보사의 존립 기반인데 이마저 방카슈랑스가 도입되면 보험사의 은행 종속화는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금융권역 내 은행의 자산 비중은 1997년 말 38.5%에서 2006년 말 71.2%로 급성장했다.

미국의 26%(2003년 기준),일본의 25%(2003년)보다 훨씬 높다.

이 결과 국내 은행은 2005년,2006년 연속 13조원대의 당기순이익을 거뒀다.

국내 생보사 순이익의 7배에 달한다.

은행이 정부의 보호 아래 덩치를 키우고 경쟁력을 강화해온 반면 보험은 규제산업으로 묶여 사업영역이 갈수록 쪼그라들고 있다.

◆정부 규제에 시름하는 보험사

설상가상으로 정부 정책이 보험사를 더욱 위기로 내몰고 있다.

종신보험과 자동차보험의 방카슈랑스 확대 시행으로 보험사의 은행 종속화는 더욱 심화될 전망이다.

특수고용직 보호법안이 시행되면 30만명에 달하는 설계사들의 4대 사회보험 가입으로 인해 보험사는 2조~3조원의 추가 비용 부담이 생긴다.

보건복지부가 추진 중인 민영의료보험의 보장 범위 축소가 시행될 경우 손해보험사의 민영의료보험은 상품 경쟁력을 상실,연간 수조원의 시장을 잃게 된다.

이에 대해 보험사 관계자들은 "우리에게도 공정한 경쟁의 기회를 달라.손발을 묶어놓고 경쟁할 수 있겠느냐"고 말한다.

보험이 은행권에 비해 왜소해진 것은 방카슈랑스와 같은 은행 보호 정책의 결과라는 주장이다.

특히 증권사들은 자본시장통합법을 계기로 경쟁력을 제고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지만 보험사는 금융의 서자(庶子) 취급을 받으며 낙동강 오리알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류근옥 서울산업대 교수는 "금융시장이 발전하려면 상호 경쟁이 전제돼야 하는데 보험사 입장에서 보면 경쟁의 틀이 불공정하다"고 지적했다.그는 "우리나라도 고령화가 진전되면서 보험산업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며 "보험의 은행 종속화가 심화될수록 보험 본연의 기능인 사회보장 기능은 위축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장진모 기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