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은 빈곤 퇴치하는 가장 강력한 엔진

18세기 뉴욕에서는 주식과 채권이 아무렇게나 거래되고 있었다.

당시 월스트리트는 진흙탕 길이었고 투자자는 거래 상대방을 일일이 찾아나서야 했다.1792년 존 서튼은 이 기회를 포착했다.

매일 12시 정각에 주식과 채권을 경매에 부치는 대신 수수료를 챙겼던 것.서튼의 이 경매소가 오늘날 뉴욕 증권거래소의 시작이다.

지난 3월 타계한 미국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의 경제학자 존 맥밀런 교수가 쓴 '시장의 탄생'(이진수 옮김,민음사)은 시장의 작동 원리와 역할을 이처럼 다양한 사례와 함께 흥미롭게 설명한다.네덜란드의 알스메르 꽃시장,일본의 스키지 어물시장,인터넷 경매회사 이베이,실리콘밸리,하노이의 '개구리시장' 등 세계 각국의 시장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시장이 어떻게 탄생하고 변화·발전해 왔는지를 보여준다.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는 17세기 암스테르담에서 미술시장 탄생을 주도했다.

렘브란트 이전의 화가들은 이른바 '자유계약 선수'였지만 대부분 부와 권력을 거머쥔 귀족들의 후원에 의존하고 있었다.그러나 렘브란트는 불안정한 후원 제도를 광범위한 미술품 구매자들이 뒷받침하는 경쟁 시장으로 대체하기 위해 애를 썼고 미술시장 형성의 기초를 놓았다.

한 세기 뒤에는 헨델을 필두로 한 독일 작곡가들이 귀족 후원자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프리랜서로 공개시장에 진출했다.

이 같은 시장의 사례들을 통해 저자는 어떤 거래든 사는 이와 파는 이 모두에게 득이 되며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 시장의 특성이라고 설명한다.그는 "건전한 시장경제의 핵심은 시장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달려 있다"며 시장이 순기능을 하기 위한 조건으로 정보의 원활한 흐름,사유재산권 보호,신뢰 구축 시스템 마련,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제도 구축,건전한 경쟁 시스템 도입 등 다섯 가지를 제시한다.

사유재산권 보호와 관련된 사례가 재미있다.

1990년대 초반 베트남의 거의 모든 트럭들이 멈춰서고 말았다.

구 소련에서 수입했거나 구 소련 기술로 만든 트럭이 대부분이었는데 소련이 무너지면서 필요한 부품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운송체계의 일대 위기를 맞은 베트남 정부는 운전기사들에게 트럭 소유권을 부여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트럭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뉴욕에서 다이아몬드 딜러들은 계약서 없이 구두계약으로 수백만달러의 다이아몬드를 서로 주고받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다이아몬드 시장은 계약을 위반할 경우 다른 모든 거래인들과도 거래할 수 없는 구조로 설계돼 있기 때문이다.

신뢰 구축 시스템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저자는 시장과 정부의 관계에 대해서도 명쾌하게 정리한다.

정부의 어떤 계획보다도 시장이 경제를 더 제대로 작동시키고,때로는 정부가 시장을 왜곡하기도 하지만 경제가 그 가능성을 최대한 발휘하려면 정부의 도움이 필수적이라는 것.뉴질랜드,러시아,중국의 각기 다른 경제개혁 과정을 통해 저자는 "정부의 역할은 규칙을 강제하는 데 있다"고 설명한다.

또 "부유한 서방의 인구보다 많은 사람들이 빈곤에 허덕이고 있는 것은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시장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며 "시장은 빈곤을 퇴치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엔진"이라고 강조한다.428쪽,1만8000원.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