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이 바보!"

鄭奎載 < 논설위원ㆍ경제교육연구소장 >

징검다리에 앉아 물장난을 하고 있는 소녀가 윤초시네 증손녀임을 소년은 안다.서울서 내려온 이 가녀린 소녀는 며칠째 그곳에서 물장난을 하고 있다.

소년은 망설이고만 있다.

소녀는 주워올린 조약돌을 내던지며 "이 바보!"하며 달아난다.소년의 귀에는 '이 바보'라는 말이 맴돈다.

어느 토요일 소년과 소녀가 개울가에서 다시 만난다.

소녀는 비단조개를 소년에게 보여주면서 말을 건넨다.그들은 가을 황금빛으로 물든 들판을 달려 산밑까지 달려간다….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그리고 너무도 잘 아는 '소나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황순원이 40대 중반에야 썼던 소설이다.소설가들이 필생에 한 번은 쓰고 싶어 하는 풋사랑 이야기요 누구나 하나 쯤은 가슴 속에 간직하고 사는 작은 사랑 이야기다.

누구에게도 이 조약돌은 있고 시골로 내려온 예쁜 소녀가 있고 소녀를 만났던 개울가가 있다.

소나기가 쏟아져 내리고 다 낡아 비를 피하기도 어려운 원두막이 있고,소녀와 소년이 어깨를 붙이며 몸을 숨겼던 수숫단이 있다.

비맞은 소녀의 어깨 위에선 하얀 김이 피어오르고…. 물이 넘친 개울을 건너면서 소년은 소녀를 업어준다.

소녀의 옷엔 소년의 등에서 배어 나온 얼룩이 물든다.

작가 황순원은 진흙물든 이 옷을 소녀가 입은 채로 죽기를 원했다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가슴을 시리게 하는 하이라이트다.

소년은 소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해준다.

꽃을 꺾어주고 남의 송아지 잔등에 올라타 우쭐하기도 하고 밭에 난 무도 뽑아주고 어느 야밤에는 덕쇠 할아버지의 호두밭에 들어가 가슴을 두근거리며 소녀에게 줄 호두를 주머니가 불룩하도록 훔쳐내기도 한다.

아버지 사업이 망해 소녀가 시골로 내려오게 된 사연이며,윤초시네 집마저도 채권자들에게 팔려가야만 하는 장면들과 어른들의 세계는 다만 어슴푸레한 배경이요,주변적 사건이 될 뿐이다.

소설은 여기까지다.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연애와 사랑의 거의 모든 구도와 남녀의 역학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작가의 작법과 직관에 감탄하게 된다.

한국인 모두는 그렇게 '소나기'를 읽으며 커왔다.

어떤 높으신 분은 이 줄거리를 '깜도 안되는' 소설 같은 이야기라고 했다.

맞다,소설이다.

소나기는 성장소설이다.

어른이 되어서는 필시 개울가 사연의 성숙판이어야 하거나 진정 새로운 차원의 사랑 이야기였어야만 하는 소설이다.

그러나 개인도 그렇고 사회조차도 성숙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한두 사람만 그런 것도 아니다.

얼굴이 하얀 이 잔망스런 소녀-어른들은 그렇게 말했다-주위에서 온 동네 머슴애들이 조약돌을 줍고 꽃을 따느라 정신을 못차렸다는 것이 최근의 소설이다.

남자들은 사실 세월이 가도 잘 성숙하지 않는다고 한다.

얼굴엔 이미 주름이 져도 늙지 않는 또 한명의 소년을 가슴 속에 안고 산다.

제임스 매튜 베리는 그 소년의 이름을 피터 팬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한국의 아내들은 이렇게 말한다.

"어린 아들과 늙은 아들,합쳐서 나는 아들 둘을 키우고 산다"고 말이다.

그런 이야기로 온통 시정의 화제로 삼은 지도 벌써 몇 주째다.

소녀에게 바쳐졌던 꽃들이며,다만 우쭐하기 위해 빌려 탔던 남의 송아지 잔등이며,마음대로 뽑아 먹었던 덜익은 무며,야밤의 덕쇠 할아버지 호두밭 이야기들도 다만 우리 사회의 미성숙을 말해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나라 예산이 어쩌고저쩌고를 논할 일은 차마 아닌 것이다.

담장 위에 서서 싸움꾼처럼 온갖 동네 일에 시비 걸기를 좋아하는 또 한명의 가슴 속 소년은 오늘 휴전선을 굳이 '걸어서 넘어가는' 작은 시위를 펼쳐보인다고 한다.

의미 과잉이야말로 소년스러움의 징표다.

아리랑을 보고 전체주의적 시대착오성이 아니라 장엄한 서정미를 느낀다는 것 역시 숨막히는 미성숙이다.

왜들 이렇게 철이 안드는지 모르겠다.

소년기가 아름다운 것은 다만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고건 전 총리는 "참여정부가 일하는 것을 보면 마치 아이들 학예회하는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지만 우리 사회는 과연 언제쯤 성숙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에 새로운 눈을 뜰 것인지.소나기는 이미 그쳤는데….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