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 10ㆍ4 공동선언] (기고) '핵ㆍ경협ㆍ인권' 삼위일체로 풀었어야

김영호 < 성신여대 교수ㆍ국제정치학 >

북한 수해로 인한 회담 일정 변경,노무현 대통령의 군사분계선 통과,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체류 연장 제안,아리랑 관람 등 파격과 이벤트가 계속된 제2차 남북 정상회담이 8개항으로 된 공동선언문을 발표하고 막을 내렸다. 제1차 정상회담 때와 달리 우리 국민은 매우 차분하고 성숙된 모습으로 이번 정상회담을 지켜보았다. 북한이 핵 실험을 한 지 꼭 1년 만에 개최된 이번 회담의 공동선언은 예상했던 대로 북핵 문제 및 군사적 긴장완화,남북 경제협력 확대,남북 문화교류 문제,인도적 문제 등을 매우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렇지만 북한의 개혁과 개방에 대한 진정한 의지가 없는 한 대규모 경제협력 사업은 우리 국민과 기업들에 부담이 될 뿐만 아니라 밑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

특히 이번 선언은 북핵 문제와 관련해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처음으로 '2ㆍ13 합의'를 존중하고 6자회담을 통해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로 확약했다는 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노 대통령이 의욕적으로 추진해 온 종전선언 문제는 유엔,미국,중국 등 주변 국가들이 연관돼 있기 때문에 이 점을 고려해 남북 정상 사이에 구체적 선언을 하기보다 관련 당사국들이 참여하는 3자 혹은 4자 회담을 개최해 논의하기로 합의하는 데 그쳤다.

회담 이전 논란이 됐던 통일방안에 관한 문제는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고 2000년 '6ㆍ15 공동선언'을 준수하기로 재확인했다. 6자회담을 통한 북핵 문제 해결에 대한 김 위원장의 확약을 받아내는 대신에 북한이 그동안 줄기차게 강조해 온 '우리 민족끼리'라는 민족공조원칙이 재천명됐다. 이렇게 볼 때 이번 선언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서로 상충되는 민족공조와 국제공조를 어떻게 조화시켜 나가야 할 것인가 하는 과제를 우리 정부에 안겨주었다.이번 합의문 내용은 회담 개최 타이밍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집권 이후 노무현 정부는 회담 개최를 집요하게 추진해왔다. 임기 말에 이뤄진 이번 회담은 너무 뒤늦은 감이 있다. '레임덕 방지용 회담'이라든지 여권 후보를 돕기 위한 '대선용 회담'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임기 말에 국가안보를 국내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했다는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이번 선언에서 천명한 대로 6자회담이라는 국제공조의 틀을 통해 북핵의 완전 폐기를 실현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번 회담에서 탈북자,국군포로,이산가족 상봉 제도화와 관련된 인도주의적 문제들에 대해서 진전된 합의가 없다는 것은 문제점으로 지적돼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북한 주민의 인권 문제에 대해 회담 과정에서 노 대통령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도 문제다. 북핵,경제협력,인도주의적 문제들이 삼위일체형으로 동시적으로 논의될 것을 기대했던 국민들에게 이번 회담은 커다란 실망을 안겨주었다.

이번 회담과 선언문 내용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회담 수용은 나름대로 철저한 계산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회담을 통해 레임덕이 없는 김 위원장은 임기 말의 노 대통령보다 자신이 더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회담을 전격적으로 수용했다. 북핵 실험 이후 유엔을 비롯해 국제사회에 의해 전방위적 대(對)북한 제재 조치가 시행되고 6자회담이 개최되고 있는 시점에서 북핵의 직접적 위협 대상국인 한국의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김 위원장에게는 커다란 외교적 승리를 안겨주는 것이었다. 이번 평양 방문에서 "김 위원장의 평화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확인했다"는 노 대통령 발언은 김 위원장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을 것이다. 우리 국민과 국제사회는 북핵의 완전폐기 없는 평화는 '거짓 평화'라고 믿고 있다. 이 점에서 노 대통령의 발언은 국민적 기대에 어긋나는 것이었다.이번 합의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북한이 합의사항을 어긴 전례에 비춰볼 때 후속조치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진행될 총리 회담과 국방장관 회담에서 진전을 이루지 못할 경우 이번 선언문은 한갓 종이조각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특히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노 대통령으로서는 시간 측면에서 김 위원장보다 훨씬 불리한 위치에 있다. 이 점을 유념하고 후속 조치를 논의해 나가는 과정에서 정권 차원이 아니라 철저하게 국익의 관점에서 합의문 이행에 임해야 할 것이다.

이번 회담에서 김 위원장은 연장 체류를 제안하면서 "대통령이 그거 결정 못하십니까?"라고 물었다. 이 에피소드는 남북한 체제 성격의 차이를 단적으로 드러내 보였다. 김 위원장은 독재자로서 모든 것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 이와 달리 한국의 대통령은 헌법이 정한 범위 내에서 우리 이념과 체제의 핵심 가치를 훼손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행동해야 한다. 남북 관계를 통일지향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장애가 되는 법률과 제도를 정비하기로 했다는 이번 합의 사항 이행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도 바로 이 점에 있다.

이번 회담을 통해 남북한 두 지도자는 역사 속의 인물로 자신들을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한반도 평화와 번영을 이룩해 큰 역사를 만든 인물로 평가받을 수 있을지 여부는 합의문의 충실한 이행 여부에 의해 판가름 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