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은 초대형 투자 줄잇는데 … 한국 기업설비투자 기피

상반기 중 회복세를 보였던 기업들의 설비 투자가 하반기 들어 급속히 위축되고 있다.

삼성전자 하이닉스반도체 LG필립스LCD 등 정보기술(IT) 업계의 라인 증설 투자를 제외하면 올 들어 조 단위 투자계획을 발표한 기업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일각에서는 기업들의 투자가 다시 얼어붙어 경기 회복에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반면 이웃 일본의 대기업들은 자신감을 찾은 듯 공격적인 신규 투자계획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업종도 반도체 LCD에 국한하지 않고 도요타자동차가 17년 만에 완성차 공장을 일본 안에 짓기로 하는 등 전 산업 분야로 확산되는 모습이다.경기 회복 시점에 대기업들이 투자를 계속 미룰 경우 자칫 성장잠재력이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다.

국제 경쟁력을 잃을 수 있다는 점에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최근 위축되고 있는 기업 투자 현황은 각종 지표로도 확인할 수 있다.한국개발연구원(KDI)은 11일 내놓은 '2007 하반기 경제전망' 보고서에서 "운수장비(자동차) 투자는 증가세를 유지하고 있으나 특수산업용 기계(반도체장비) 투자가 감소했다"며 "7,8월 설비투자는 전 분기에 비해 큰 폭으로 하락했다"고 진단했다.

재정경제부도 이날 발표한 그린북(최근 경제동향)에서 "기계 수주 및 기계류 수입 등 설비투자의 선행지표 증가세가 다소 둔화됐다"고 밝혔다.

향후 설비투자 전망이 그리 밝지 않다는 얘기다.통계청에 따르면 국내 기업들의 설비투자는 지난 1분기 11.3%,2분기 12.1% 늘어났으나 하반기 들어 7월 1.0%,8월 1.7%로 급락했다.

경기가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는데도 설비투자가 오히려 뒷걸음질치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지난 7월과 8월 산업생산이 두 자릿수 증가율(각각 14.3%,11.2%)을 기록하고 공장 가동률이 완전 가동 수준에 근접한 83.7%로 높아졌는데도 설비투자 증가세가 급락했다는 것은 기업들의 투자 마인드가 그만큼 얼어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상반기 설비투자가 늘어난 것도 신권 발행에 따른 착시 현상이라는 분석이다.

은행의 자동입출금기(ATM)와 각종 자동판매기 교체에 따른 일시적인 투자 수요 덕분이라는 것.

기업들의 자본 축적은 외환위기 이후부터 정체됐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민간의 실질 총자본 형성액(신규 투자액에서 처분액을 제외한 순증분)은 지난해 177조2589억원으로 외환위기가 발생했던 1997년(163조9920억원)에 비해 불과 8.1% 많은 수준에 그쳤다.

국내 경제 규모가 이 기간 중 45% 증가(국내총생산 기준)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기업들의 자본 형성은 사실상 뒷걸음질친 셈이다.

신규 투자를 하기 보다는 기존 설비를 개·보수하고 재고 물량을 더 확보하는 데 필요한 자본만 투자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반면 경쟁국 일본에서는 경기 회복세를 타고 기업들의 자국 내 초대형 투자가 잇따르고 있다.

금년에만 자동차 반도체 LCD 등 성장동력 업종의 대표 기업들이 6000억~1조엔(약 4조8000억~8조원)대의 대형 투자계획을 내놓았다.

액정TV가 주력인 샤프는 오사카 인근 사카이시에 1조엔을 투자해 2009년까지 세계 최대 LCD 생산단지를 짓겠다고 지난 7월 말 발표했다.

단지 면적만 127ha로 샤프의 기존 주력 생산시설인 미에현 가메야마 공장의 네 배 규모다.

도시바는 지난달 초 미에현 욧카이치시에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공장을 완공해 본격 가동에 들어갔다.

총 6000억엔을 투자한 이 공장에선 낸드형 플래시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한다.

도요타자동차는 17년 만에 완성차 생산공장을 일본 내에 짓기로 했다.

센다이 지역에 2009년 완공할 새 공장에는 총 1000억엔(약 8000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생산능력은 연간 15만~20만대 수준.혼다자동차도 30년 만에 처음으로 도쿄 인근의 사이타마현에 새 공장을 짓고 있다.

각종 규제와 노사 갈등을 피해 해외로 뛰쳐 나가고 있는 국내 기업과는 영 딴판이다.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이에 대해 "국내에서는 신수종 사업을 발굴하는 사례가 최근에 없었고 해외에 투자하는 사례가 많았다"며 "투자를 잘못 했을 경우 떠안아야 하는 위험 부담이 예전보다 훨씬 많아진 데다 새롭게 공장을 짓기보다는 주식 투자하듯 지분 투자를 하는 사례가 많아 국내 설비투자가 늘어나지 않고 있다"고 분석했다.

현승윤 기자/도쿄=차병석 특파원 hyuns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