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기술표준 로열티 '봉' 안되려면

金正浩 < 자유기업원 원장 >

2006년 2월8일 유럽연합의 정보사회미디어위원장 비비언 레딩은 앞으로 유럽이 디지털TV 산업에서 단일표준을 포기하고 시장경쟁 방식을 택하겠다고 선언했다.방송사마다 서로 다른 기술을 사용하면 단기적으로는 많은 낭비가 발생한다.

극단적으로는 방송사의 숫자만큼 TV 수상기를 갖춰야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연합은 단일 표준이 아니라 시장 경쟁을 통해 자생적 표준이 나타나도록 하겠다고 결정한 것이다.그 첫째 이유는 여러 개의 기술 중에서 어떤 것이 좋은지를 판단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지만,단일 표준이 경쟁을 억제해서 기술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기도 했다.

장기적으로는 표준의 의무화가 오히려 산업 발전을 해칠 수 있는 것이다.

세계는 이미 표준을 둘러싼 단기적 이익과 장기적 손해간의 이러한 관계를 경험한 터이다.유럽 사람들은 유럽의 다른 나라를 여행할 때도 휴대전화 로밍을 할 필요가 없다.

모든 이동통신사가 GSM이라는 단일 표준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GSM뿐만 아니라 CDMA,TDMA,iDEN 등 여러 개의 방식이 서로 경쟁했다.당연히 미국의 휴대전화가 처음에는 유럽의 것에 비해 불편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미국의 통신업체들이 자발적 노력을 통해 기술의 차이 때문에 생겼던 불편을 해소한 데다가,기업간 치열한 경쟁 덕분에 유럽보다 가격이 낮아졌다.

기술이 복잡하고 변화의 가능성이 클수록 표준을 강요하는 데 따른 장기적 비용은 커지기 마련이다.

한국경제신문 10월29일자에 보도된 위피는 좋은 사례다.

위피란 PC에서의 윈도처럼 무선인터넷을 위한 플랫폼의 하나인데,한국 정부가 2005년 4월부터 무선인터넷을 위한 유일한 기술표준으로 채택했다.

무선인터넷을 사용하는 휴대전화는 모두 이 위피를 의무적으로 탑재해야 하는 것이다.

그 후로 이것을 둘러싼 이견이 끊이지 않고 있다.

국산 플랫폼을 만들겠다는 야심과는 달리 실질적으로 썬마이크로시스템즈의 자바 엔진을 의무화한 셈이 된 데다가,이동통신사들의 입장에서도 그런 의무를 짊어지는 것이 달가울 리 없기 때문이다.

노키아나 소니-에릭슨 같은 외국의 휴대전화업체들이 들어오지 못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플랫폼을 통일함으로써 콘텐츠 공급자들의 중복 개발 비용을 없앤다는 본래의 취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의도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이동통신사업자들은 각자의 필요에 맞게 위피의 구체적 모습들을 변형시켜 왔다.

실질적으로 여러 개의 위피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위피를 도입하게 된 원래의 목적,즉 한 개의 콘텐츠를 만들어 모든 휴대전화에서 범용으로 사용하게 한다는 취지도 무색해졌다.

통신사들마다 고유의 콘텐츠를 가지고 싶어하는 한국 고유의 문화적 풍토 역시 위피의 실패에 큰 작용을 했다.

결국 위피는 본래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한 채,비용만 높여놓은 꼴이 된 것이다.

이제 이동통신사들이 자신의 전화기에 어떤 플랫폼을 탑재(搭載)할지는 스스로 결정하게 해야 한다.

그들은 소비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최선의 플랫폼을 만들어갈 것이다.

물론 표준을 두는 것이 좋을 때도 많다.

특히 기술 발전 여지가 없고 단일 표준의 이익이 명백할 때는 그렇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차량의 우측통행이라는 표준이다.

차량 통행방법은 좌측통행이든 우측통행이든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더 좋은 것이 나올 여지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 우측이든 좌측이든 하나를 골라서 표준으로 강제하는 것은 정부의 마땅한 책무다.그러나 끊임없이 변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변하게 될 기술들에 있어서는 사정이 다르다.

어떤 것이 업계의 표준이 될지는 기술 공급자들 간의 경쟁과 기술 사용자의 선택을 통해 결정되도록 정부는 비켜서 있는 것이 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