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들의 세상 사는 이야기] 임성주 C&그룹 부회장 "40년 직장생활 최대 재산은 1000여명 知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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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上)머슴 철학'으로 전문경영인 꿈 이뤄…'재계의 마당발' 된 비결은
그는 받는 것보다 주는 데 익숙하다고 했다.그래서 처음 CEO(최고경영자)가 된 10여년 전부터 급여의 10%를 봉사단체에 기부하고 있다.
또 '보고 싶다'는 후배와 지인들의 청을 차마 뿌리치지 못해 밥값과 술값으로만 매달 수백만원의 사비를 턴다.
그렇게 해서 그가 얻은 것은 1000명이 넘는 '우군'이다.아낌없이 베푼 대가는 언제라도 소주잔을 기울이며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1000여명의 '마음'이었다.
임성주 C&그룹 부회장(63)은 넉넉한 마음 만큼이나 해맑은 웃음과 편안한 말투가 일품이었다.
'재계의 마당발'이란 별명은 괜히 붙여진 게 아니었다.어린 시절 머슴의 왕인 '상(上)머슴'의 모습에 반해 오너를 보좌하는 전문경영인이 되는 꿈을 꿨다는 임 부회장.장영신 애경그룹 회장에 이어 임병석 C&그룹 회장을 상머슴처럼 모시고 있는 그를 선선한 바람이 불던 10월 어느날 한강 유람선에서 만났다.
#"건강은 나의 힘"
―임직원들이 '백만돌이'(에너자이저 광고에서 팔굽혀펴기를 100만개 넘게 하는 건전지 모델)라고 부르던데요.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세요."타고난 것 같아요. 시간이 없어 별다른 운동은 못하거든요. 일주일에 한두 차례 양재천 주변을 산책하고,가끔 골프 치는 게 전부예요. 운동보다는 긍정적인 사고와 아무거나 잘 먹는 식습관이 건강유지에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부회장급이 되면 업무 강도가 그리 높지는 않죠?
"웬걸요. 아침에 화장실에서 '큰일'을 못 보면 다음날로 미뤄야 할 정도예요. 결재하랴,회의하랴,손님 접대하랴,전화 받으랴….평일엔 그룹 업무와 함께 제가 직접 맡고 있는 우방랜드나 진도모피 사무를 주로 보고,토ㆍ일요일에는 한강유람선을 점검해요. 사실상 휴일이 없는 셈이죠.저녁엔 매일 2~3건씩 약속이 기다립니다. 오늘도 2건 있었는데 취소했어요. 그러니 귀가하면 쓰러질 수밖에요. 하지만 4~5시간 숙면을 취하고 나면 다시 쌩쌩해져요."
#유복했던 어린 시절
―어린 시절은 어땠나요.
"목포에서 부잣집 둘째 아들로 자랐습니다. 당시 아버지가 한국전력 목포지점장이셨어요. 초등학교 다닐 땐 한국전쟁 직후라 하루 세 끼만 먹어도 부잣집이라고들 했는데,저는 장조림을 도시락 반찬으로 싸올 정도였어요. 아버지는 한전에서 임원까지 했고,형(임성춘 전 한국전력기술 사장)도 한전에서 청춘을 바쳤습니다. 2대에 걸쳐 80년을 한전에 '충성'한 셈이죠."
―친구들의 시샘을 받았겠네요.
"그랬을 수도 있죠.부잣집 아들인 데다 공부도 곧 잘했거든요. 그래도 활달한 성격 덕분에 친구들과는 잘 지냈어요. 한번은 선생님이 저를 부르더니 '네가 반장이니까 학비 못낸 친구들 집에 가서 받아오라'고 시키는 겁니다. 가보면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집들이에요. 전쟁 탓에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와 사는데….어린 마음에도 너무 가슴이 아파서 어머니에게 사정해 친구들에게 학비를 건네줬어요. 그 다음에는 아버지에게 부탁해 학비를 마련해줬죠."
―학창 시절 꿈은 뭐였나요.
"고등학교 때는 해군 장교가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해군사관학교 입학시험에서 미끄러졌죠.수학에서 과락 점수를 받아서….지금 생각하면 떨어진 게 오히려 잘된 것 같기도 하고.
―기업인이 될 생각은 없었나요.
"돌이켜보면 어렸을 때부터 상머슴에 대한 동경이 있었어요. 제 외갓집이 전남 담양의 큰 부잣집이었는데,그 집의 상머슴이 멋져 보였거든요. 다른 머슴들과는 격이 달라요. 밥도 좋은 반찬에 따로 먹고….'나중에 머슴살이를 하게 된다면 나도 상머슴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전남대에 입학한 뒤 그 시절 생각이 다시 떠올랐어요. 그래서 '남들보다 빨리 회사에 들어가 초고속 승진을 해보자'고 마음 먹게 됐죠.결과적으로 꿈은 이뤘네요."
#애경그룹 최고의 영업맨이 되다
―첫 직장으로 애경을 택한 이유가 있습니까.
"애경 창업주인 고(故) 채몽인씨가 제 아버지와 절친한 친구였어요. 나이도 같고,일본에서 공부도 함께 했죠.그러다보니 저도 자연스럽게 애경가(家)와 친분을 쌓게 됐죠.1968년 군 복무를 마치자마자 말단 사원으로 입사했습니다. 당시 애경은 재계 7위 규모의 큰 기업이어서 인재들이 몰렸죠.입사 후에도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직장 초년병 시절은 어땠나요.
"입사 초기에 영업이사가 부르더니 '포부를 한번 얘기해 보라'고 합디다. 그래서 '사장에 한번 도전해 보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야,이 XX야,사장님(창업주)이 계신데 무슨 소리야' 하면서 화를 내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지금 우리 계열사가 4개인데 이걸 40개로 늘려 저도 하나 맡겠다는 취지입니다' 이렇게 맞받았죠.얘기를 듣더니 수긍이 가는지,'너 꼭 사장해라.안 되면 구멍가게를 차려서라도 사장해!'라고 하더군요."
―영업맨 시절 얘기를 해 주시죠.
"처음엔 비누 팔러 시장을 누볐죠.'장돌뱅이'처럼 봇짐을 싸매고 장이 서는 곳을 돌아다녔어요. 남대문 동대문 을지로를 훑었고,국방부 철도청 조달청을 찾아다니며 특수판매도 했습니다."
―부잣집 아들이 시장통을 돌아다니며 영업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영업을 아주 잘했어요. 1등도 많이 했었죠.부지런하고,인사성 밝았으니까. 외모 덕도 많이 봤어요. 제가 만약 키 크고,잘 생겼다면 최고의 영업맨이 됐겠어요? 아담한 키에 부담없는 인상이다 보니 거래처에서 편안하게 대한 거죠(웃음)."
―최고의 영업맨이었으니 주량도 대단하겠어요.
"많이 못 마셔요. 위스키 맥주 막걸리 매실주는 어느 정도 먹는데 소주는 몸에서 안받아요. 저는 술 실력보다 분위기를 잘 맞추는 편이에요. 노래도 곧 잘하고.'막춤' 실력은 좌중을 놀래킬 정도예요.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과일이나 휴지 등을 이용해 재미있게 '변장'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술 한잔 마시고 나면 거래처 사람들과 흉금을 터놓는 친구가 되곤 하죠."
#39년 동안 휴가 한번 못간 사연
―1968년 입사한 뒤 한번도 휴가를 안 가셨는데.
"창업주가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돌아가시고,부인인 장영신 회장이 35세에 회사를 물려받았어요. 그 때부터 37년 동안 '비공식 비서실장' 생활을 했어요. 남편 친구의 아들이니,저보다 편한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영업을 뛰면서도 지근거리에서 회장님을 보좌했죠.그러다 보니 휴가 때 회장님이 찾을까봐 안 간 거예요. 스스로를 머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휴가를 못간 데 대한 미련이나 아쉬움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도 가족은 그렇지 않잖아요.
"사실 신혼여행도 제대로 못갔어요. 토요일 오후 1시까지 근무하고 결혼식을 마친 뒤 부산 해운대로 갔죠.부산 지점 동기들과 밤새 술 먹고 났더니 영업부장한테 전화가 왔어요. 월요일 오전 10시에 조달청에서 발주하는 대규모 입찰이 있는데 꼭 참석해야 한다는 겁니다. 일요일에 곧바로 새마을호 타고 서울로 돌아왔죠.처음이자 마지막 휴가가 그랬어요. 사실 저는 남편이나 아버지로선 '0점' 짜리예요. 그런데도 별다른 불평 한번 안 한 아내와 아들에게 고마울 따름이죠."
―그렇게 일만 했으니 취미도 없겠어요.
"맞아요. 바둑 장기 등 잡기는 전혀 못하고,골프도 잘 못 칩니다. 골프 치면서도 업무가 생각나서 집중이 안 돼요. 타수를 안 세고 칠 때도 있어요."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세요.
"일에 집중하다 보면 아예 일에 빠져버려요. 스트레스 받을 시간이 없는 거지.오히려 멍하니 있으면 어깨도 아프고,머리도 쑤셔요. 그러다 어려운 일이 주어지면 다시 머리가 맑아지고 반짝반짝해집니다. 나 '워커홀릭'인가봐.(웃음)"
#애경을 떠나 C&그룹으로 옮기다
―CEO는 언제 됐나요.
"서른아홉에 임원이 됐고,쉰셋에 애경화학 사장이 됐죠.1996년이었어요. 저는 사실 영업만 하다 사장이 된 탓에 구매나 생산에 대해선 잘 몰랐어요. 드럼만 치던 놈이 트럼펫과 기타까지 알아야 하니 너무 힘든 거야.그때 고생하면서 많이 배웠죠.CEO는 벼랑 끝에 선 자리예요. 여기서 떨어지면 죽거든.사장과 부사장은 '한끗발' 차이지만 주어진 책임으로 보면 하늘과 땅 차이예요. 작은 회사라도 사장 한번 해 본 사람과 안 해본 사람은 확실히 생각하는 게 달라요."
―10여년간 CEO로 일을 풀어나가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었나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러다 보면 '아,누구를 만나 자문을 구해보자'란 생각이 퍼뜩 떠올라요. 그러면서 답이 나오는 거야.얽히고 설킨 실타래가 풀리듯이.저는 바로 판단하기보다는 먼저 심사숙고하고,주변에 도움을 구하는 스타일입니다. 실수가 훨씬 줄어들죠."
―그렇게 애정을 가지고 열심히 일한 애경그룹을 왜 떠났나요.
"저야 제 이력서를 '애경 입사,애경 퇴직' 이렇게 한 줄로 끝내고 싶었죠.하지만 장 회장님이 건강 때문에 물러나고 2세 경영이 본격화되는데 제가 계속 있을 수 있습니까. 10년 동안 애경에서 사장,부회장을 했으니 후배들 위해 물러나는 게 당연했고….장 회장님에게 '회장님 따라 저도 떠나겠습니다' 했더니 눈물을 보이며 아쉬워하더군요. 그러던 중 종친모임에서 안면을 익힌 임병석 회장님이 함께 일하자고 제의해왔죠.더 일하고 싶은 열정도 있고,힘도 남아 있는 것 같아 장 회장님과 상의한 끝에 옮긴 겁니다."
―자기 사업을 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나요.
"사실 제 장인이 충청도에서 제일 큰 토건업체를 운영했어요. 결혼하니까 장인이 '같이 일하자'고 제의하더군요. '지금 내 일이 좋고 잘할 자신 있다'고 거절했죠.그랬더니 오히려 똑똑하고 생각이 바르다며 좋아하시데요. 한창 영업으로 주가를 올릴 때도 독립해보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지만 뿌리쳤어요. 저는 지금도 신입사원 교육 때 '본가나 처가에 손벌릴 사람은 당장 나가라'고 해요. 이를 악물고 자기 힘으로 살아갈 생각 안하면 봉급쟁이 생활 제대로 못합니다."
#40년 직장생활의 최고 수확은 사람
―재계의 마당발로 통하는데,편하게 연락하는 지인이 얼마나 됩니까.
"회사 사람 빼고도 1000명은 족히 될 겁니다. 중ㆍ고교,대학,ROTC,서울대 AMP(최고경영자 과정),고려대 AMP,한국능률협회 회원,애경 사우 등등….선배보다는 후배들과 더 가까워요.
밤에 자다가도 '보고 싶다'고 전화오면 귀찮아도 나갑니다. 돌이켜 보면 40년 직장생활에서 남은 제일 큰 자산이 바로 사람이거든요. 이 친구들 때문에 저는 항상 '살맛'이 나요. 이민은 절대 안갈 거예요."
―1000명이나 되는 사람을 어떻게 관리합니까.
"일단 경조사는 절대 안 빠집니다. 제가 참석을 못 하면 아내나 비서를 보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작은 관심이에요. 사실 1000명을 언제 다 만납니까. 저는 비서를 통해서 '내가 당신에게 항상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걸 알려줍니다. 비서에게 여기 저기에 전화 걸어 '잘 지내시죠.임 부회장이 안부 묻습니다. 하지만 지금 바쁘니까 콜 백하실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전하도록 하지요. 그러면 '바쁜 사람이 안부도 묻네' 하고 좋아합니다. "
―마당발이 업무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나요.
"중국에서의 '관시'보다 한국에서의 인간관계가 사회생활하는 데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한 다리만 건너면 누구든 알 수 있잖아요. 일을 원만하게 해결하는 데 지인들이 도움을 줄 때가 많죠.그래서 저 역시 누가 부탁하면 양심에 거리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도와주려고 노력합니다."
―은퇴 후엔 어떤 일을 하고 싶으세요."중소기업 컨설팅을 해주고 싶어요. 많은 중소기업 사장들이 일이 잘 안 풀리면 직원 탓으로 돌리잖아요. 저는 그런 사장들에게 이렇게 물을 겁니다. '사장님,골프 핸디 얼마예요?''회사에 사장님 친인척은 몇 명이나 있죠?' '비자금은 얼마나 갖고 있으세요?' 등등.직원 잘못이 아닌 사장 잘못이란 걸 깨우쳐주려고요. 사장이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직원들도 일손을 놓습니다. 회사가 바뀌려면 사장부터 바뀌어야 하거든요."
정리=오상헌 기자 ohyeah@hankyung.com
그는 받는 것보다 주는 데 익숙하다고 했다.그래서 처음 CEO(최고경영자)가 된 10여년 전부터 급여의 10%를 봉사단체에 기부하고 있다.
또 '보고 싶다'는 후배와 지인들의 청을 차마 뿌리치지 못해 밥값과 술값으로만 매달 수백만원의 사비를 턴다.
그렇게 해서 그가 얻은 것은 1000명이 넘는 '우군'이다.아낌없이 베푼 대가는 언제라도 소주잔을 기울이며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1000여명의 '마음'이었다.
임성주 C&그룹 부회장(63)은 넉넉한 마음 만큼이나 해맑은 웃음과 편안한 말투가 일품이었다.
'재계의 마당발'이란 별명은 괜히 붙여진 게 아니었다.어린 시절 머슴의 왕인 '상(上)머슴'의 모습에 반해 오너를 보좌하는 전문경영인이 되는 꿈을 꿨다는 임 부회장.장영신 애경그룹 회장에 이어 임병석 C&그룹 회장을 상머슴처럼 모시고 있는 그를 선선한 바람이 불던 10월 어느날 한강 유람선에서 만났다.
#"건강은 나의 힘"
―임직원들이 '백만돌이'(에너자이저 광고에서 팔굽혀펴기를 100만개 넘게 하는 건전지 모델)라고 부르던데요.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세요."타고난 것 같아요. 시간이 없어 별다른 운동은 못하거든요. 일주일에 한두 차례 양재천 주변을 산책하고,가끔 골프 치는 게 전부예요. 운동보다는 긍정적인 사고와 아무거나 잘 먹는 식습관이 건강유지에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부회장급이 되면 업무 강도가 그리 높지는 않죠?
"웬걸요. 아침에 화장실에서 '큰일'을 못 보면 다음날로 미뤄야 할 정도예요. 결재하랴,회의하랴,손님 접대하랴,전화 받으랴….평일엔 그룹 업무와 함께 제가 직접 맡고 있는 우방랜드나 진도모피 사무를 주로 보고,토ㆍ일요일에는 한강유람선을 점검해요. 사실상 휴일이 없는 셈이죠.저녁엔 매일 2~3건씩 약속이 기다립니다. 오늘도 2건 있었는데 취소했어요. 그러니 귀가하면 쓰러질 수밖에요. 하지만 4~5시간 숙면을 취하고 나면 다시 쌩쌩해져요."
#유복했던 어린 시절
―어린 시절은 어땠나요.
"목포에서 부잣집 둘째 아들로 자랐습니다. 당시 아버지가 한국전력 목포지점장이셨어요. 초등학교 다닐 땐 한국전쟁 직후라 하루 세 끼만 먹어도 부잣집이라고들 했는데,저는 장조림을 도시락 반찬으로 싸올 정도였어요. 아버지는 한전에서 임원까지 했고,형(임성춘 전 한국전력기술 사장)도 한전에서 청춘을 바쳤습니다. 2대에 걸쳐 80년을 한전에 '충성'한 셈이죠."
―친구들의 시샘을 받았겠네요.
"그랬을 수도 있죠.부잣집 아들인 데다 공부도 곧 잘했거든요. 그래도 활달한 성격 덕분에 친구들과는 잘 지냈어요. 한번은 선생님이 저를 부르더니 '네가 반장이니까 학비 못낸 친구들 집에 가서 받아오라'고 시키는 겁니다. 가보면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집들이에요. 전쟁 탓에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와 사는데….어린 마음에도 너무 가슴이 아파서 어머니에게 사정해 친구들에게 학비를 건네줬어요. 그 다음에는 아버지에게 부탁해 학비를 마련해줬죠."
―학창 시절 꿈은 뭐였나요.
"고등학교 때는 해군 장교가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해군사관학교 입학시험에서 미끄러졌죠.수학에서 과락 점수를 받아서….지금 생각하면 떨어진 게 오히려 잘된 것 같기도 하고.
―기업인이 될 생각은 없었나요.
"돌이켜보면 어렸을 때부터 상머슴에 대한 동경이 있었어요. 제 외갓집이 전남 담양의 큰 부잣집이었는데,그 집의 상머슴이 멋져 보였거든요. 다른 머슴들과는 격이 달라요. 밥도 좋은 반찬에 따로 먹고….'나중에 머슴살이를 하게 된다면 나도 상머슴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전남대에 입학한 뒤 그 시절 생각이 다시 떠올랐어요. 그래서 '남들보다 빨리 회사에 들어가 초고속 승진을 해보자'고 마음 먹게 됐죠.결과적으로 꿈은 이뤘네요."
#애경그룹 최고의 영업맨이 되다
―첫 직장으로 애경을 택한 이유가 있습니까.
"애경 창업주인 고(故) 채몽인씨가 제 아버지와 절친한 친구였어요. 나이도 같고,일본에서 공부도 함께 했죠.그러다보니 저도 자연스럽게 애경가(家)와 친분을 쌓게 됐죠.1968년 군 복무를 마치자마자 말단 사원으로 입사했습니다. 당시 애경은 재계 7위 규모의 큰 기업이어서 인재들이 몰렸죠.입사 후에도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직장 초년병 시절은 어땠나요.
"입사 초기에 영업이사가 부르더니 '포부를 한번 얘기해 보라'고 합디다. 그래서 '사장에 한번 도전해 보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야,이 XX야,사장님(창업주)이 계신데 무슨 소리야' 하면서 화를 내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지금 우리 계열사가 4개인데 이걸 40개로 늘려 저도 하나 맡겠다는 취지입니다' 이렇게 맞받았죠.얘기를 듣더니 수긍이 가는지,'너 꼭 사장해라.안 되면 구멍가게를 차려서라도 사장해!'라고 하더군요."
―영업맨 시절 얘기를 해 주시죠.
"처음엔 비누 팔러 시장을 누볐죠.'장돌뱅이'처럼 봇짐을 싸매고 장이 서는 곳을 돌아다녔어요. 남대문 동대문 을지로를 훑었고,국방부 철도청 조달청을 찾아다니며 특수판매도 했습니다."
―부잣집 아들이 시장통을 돌아다니며 영업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영업을 아주 잘했어요. 1등도 많이 했었죠.부지런하고,인사성 밝았으니까. 외모 덕도 많이 봤어요. 제가 만약 키 크고,잘 생겼다면 최고의 영업맨이 됐겠어요? 아담한 키에 부담없는 인상이다 보니 거래처에서 편안하게 대한 거죠(웃음)."
―최고의 영업맨이었으니 주량도 대단하겠어요.
"많이 못 마셔요. 위스키 맥주 막걸리 매실주는 어느 정도 먹는데 소주는 몸에서 안받아요. 저는 술 실력보다 분위기를 잘 맞추는 편이에요. 노래도 곧 잘하고.'막춤' 실력은 좌중을 놀래킬 정도예요.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과일이나 휴지 등을 이용해 재미있게 '변장'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술 한잔 마시고 나면 거래처 사람들과 흉금을 터놓는 친구가 되곤 하죠."
#39년 동안 휴가 한번 못간 사연
―1968년 입사한 뒤 한번도 휴가를 안 가셨는데.
"창업주가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돌아가시고,부인인 장영신 회장이 35세에 회사를 물려받았어요. 그 때부터 37년 동안 '비공식 비서실장' 생활을 했어요. 남편 친구의 아들이니,저보다 편한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영업을 뛰면서도 지근거리에서 회장님을 보좌했죠.그러다 보니 휴가 때 회장님이 찾을까봐 안 간 거예요. 스스로를 머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휴가를 못간 데 대한 미련이나 아쉬움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도 가족은 그렇지 않잖아요.
"사실 신혼여행도 제대로 못갔어요. 토요일 오후 1시까지 근무하고 결혼식을 마친 뒤 부산 해운대로 갔죠.부산 지점 동기들과 밤새 술 먹고 났더니 영업부장한테 전화가 왔어요. 월요일 오전 10시에 조달청에서 발주하는 대규모 입찰이 있는데 꼭 참석해야 한다는 겁니다. 일요일에 곧바로 새마을호 타고 서울로 돌아왔죠.처음이자 마지막 휴가가 그랬어요. 사실 저는 남편이나 아버지로선 '0점' 짜리예요. 그런데도 별다른 불평 한번 안 한 아내와 아들에게 고마울 따름이죠."
―그렇게 일만 했으니 취미도 없겠어요.
"맞아요. 바둑 장기 등 잡기는 전혀 못하고,골프도 잘 못 칩니다. 골프 치면서도 업무가 생각나서 집중이 안 돼요. 타수를 안 세고 칠 때도 있어요."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세요.
"일에 집중하다 보면 아예 일에 빠져버려요. 스트레스 받을 시간이 없는 거지.오히려 멍하니 있으면 어깨도 아프고,머리도 쑤셔요. 그러다 어려운 일이 주어지면 다시 머리가 맑아지고 반짝반짝해집니다. 나 '워커홀릭'인가봐.(웃음)"
#애경을 떠나 C&그룹으로 옮기다
―CEO는 언제 됐나요.
"서른아홉에 임원이 됐고,쉰셋에 애경화학 사장이 됐죠.1996년이었어요. 저는 사실 영업만 하다 사장이 된 탓에 구매나 생산에 대해선 잘 몰랐어요. 드럼만 치던 놈이 트럼펫과 기타까지 알아야 하니 너무 힘든 거야.그때 고생하면서 많이 배웠죠.CEO는 벼랑 끝에 선 자리예요. 여기서 떨어지면 죽거든.사장과 부사장은 '한끗발' 차이지만 주어진 책임으로 보면 하늘과 땅 차이예요. 작은 회사라도 사장 한번 해 본 사람과 안 해본 사람은 확실히 생각하는 게 달라요."
―10여년간 CEO로 일을 풀어나가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었나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러다 보면 '아,누구를 만나 자문을 구해보자'란 생각이 퍼뜩 떠올라요. 그러면서 답이 나오는 거야.얽히고 설킨 실타래가 풀리듯이.저는 바로 판단하기보다는 먼저 심사숙고하고,주변에 도움을 구하는 스타일입니다. 실수가 훨씬 줄어들죠."
―그렇게 애정을 가지고 열심히 일한 애경그룹을 왜 떠났나요.
"저야 제 이력서를 '애경 입사,애경 퇴직' 이렇게 한 줄로 끝내고 싶었죠.하지만 장 회장님이 건강 때문에 물러나고 2세 경영이 본격화되는데 제가 계속 있을 수 있습니까. 10년 동안 애경에서 사장,부회장을 했으니 후배들 위해 물러나는 게 당연했고….장 회장님에게 '회장님 따라 저도 떠나겠습니다' 했더니 눈물을 보이며 아쉬워하더군요. 그러던 중 종친모임에서 안면을 익힌 임병석 회장님이 함께 일하자고 제의해왔죠.더 일하고 싶은 열정도 있고,힘도 남아 있는 것 같아 장 회장님과 상의한 끝에 옮긴 겁니다."
―자기 사업을 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나요.
"사실 제 장인이 충청도에서 제일 큰 토건업체를 운영했어요. 결혼하니까 장인이 '같이 일하자'고 제의하더군요. '지금 내 일이 좋고 잘할 자신 있다'고 거절했죠.그랬더니 오히려 똑똑하고 생각이 바르다며 좋아하시데요. 한창 영업으로 주가를 올릴 때도 독립해보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지만 뿌리쳤어요. 저는 지금도 신입사원 교육 때 '본가나 처가에 손벌릴 사람은 당장 나가라'고 해요. 이를 악물고 자기 힘으로 살아갈 생각 안하면 봉급쟁이 생활 제대로 못합니다."
#40년 직장생활의 최고 수확은 사람
―재계의 마당발로 통하는데,편하게 연락하는 지인이 얼마나 됩니까.
"회사 사람 빼고도 1000명은 족히 될 겁니다. 중ㆍ고교,대학,ROTC,서울대 AMP(최고경영자 과정),고려대 AMP,한국능률협회 회원,애경 사우 등등….선배보다는 후배들과 더 가까워요.
밤에 자다가도 '보고 싶다'고 전화오면 귀찮아도 나갑니다. 돌이켜 보면 40년 직장생활에서 남은 제일 큰 자산이 바로 사람이거든요. 이 친구들 때문에 저는 항상 '살맛'이 나요. 이민은 절대 안갈 거예요."
―1000명이나 되는 사람을 어떻게 관리합니까.
"일단 경조사는 절대 안 빠집니다. 제가 참석을 못 하면 아내나 비서를 보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작은 관심이에요. 사실 1000명을 언제 다 만납니까. 저는 비서를 통해서 '내가 당신에게 항상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걸 알려줍니다. 비서에게 여기 저기에 전화 걸어 '잘 지내시죠.임 부회장이 안부 묻습니다. 하지만 지금 바쁘니까 콜 백하실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전하도록 하지요. 그러면 '바쁜 사람이 안부도 묻네' 하고 좋아합니다. "
―마당발이 업무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나요.
"중국에서의 '관시'보다 한국에서의 인간관계가 사회생활하는 데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한 다리만 건너면 누구든 알 수 있잖아요. 일을 원만하게 해결하는 데 지인들이 도움을 줄 때가 많죠.그래서 저 역시 누가 부탁하면 양심에 거리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도와주려고 노력합니다."
―은퇴 후엔 어떤 일을 하고 싶으세요."중소기업 컨설팅을 해주고 싶어요. 많은 중소기업 사장들이 일이 잘 안 풀리면 직원 탓으로 돌리잖아요. 저는 그런 사장들에게 이렇게 물을 겁니다. '사장님,골프 핸디 얼마예요?''회사에 사장님 친인척은 몇 명이나 있죠?' '비자금은 얼마나 갖고 있으세요?' 등등.직원 잘못이 아닌 사장 잘못이란 걸 깨우쳐주려고요. 사장이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직원들도 일손을 놓습니다. 회사가 바뀌려면 사장부터 바뀌어야 하거든요."
정리=오상헌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