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예산 10조원시대라지만‥] (中) 여전한 나눠먹기 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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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D예산 10조원시대라지만 ‥ (中) 여전한 나눠먹기 관행"공무원 임용시험 문제를 낸 사람이 시험에 응시해 공무원이 된다는 건 말도 안되지요? 그런데 연구개발 예산 집행에서는 이런 사례가 드물지 않게 나타납니다.
전문성이 떨어지는 공무원 등을 대신해 R&D 과제 선정에 관여했던 사람이 얼마 뒤 연구자 공모에 참여해 손쉽게 예산을 따가는 식이지요."서울의 한 대학에 몸담고 있는 A씨는 지난 8월 초 매년 20억원 안팎의 자금을 최대 7년까지 지원받는 중장기 기술개발과제 공모에 참여하면서 기대가 컸다.
이 정도 자금이면 사업성 있는 첨단소재 개발에 몰두할 수 있을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프로젝트는 연구과제 기획에 참여한 기관에서 가져갔다.A씨는 "연구계획서 등을 평가하는데 모범답안을 아는 쪽과 그렇지 못한 쪽이 다툼을 벌인 꼴"이라며 "애초부터 경쟁이 안 되는데 헛심만 쏟았다"고 푸념했다.◆그들만의 돈 잔치
과학기술 분야의 일선 연구자들은 정부 R&D 과제를 공정 경쟁을 통해 수주하기가 쉽지 않고 이것이 연구개발 투자의 효율을 떨어뜨리는 주요 요인 중 하나로 꼽는다.
정부에서 연구자들끼리 경쟁하도록 유도해도 모자랄 판에 산하기관 등 제식구 감싸기나 친분있는 연구자 봐주기 관행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경희대 의대의 한 교수는 "절차적 투명성을 높이는 장치가 외형상 강화되면서 돈은 더 교묘한 방식으로 새나가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산자부가 올해 선정한 차세대신기술개발사업과 중기거점기술개발사업의 경우 생산기술연구원,자동차부품연구원,전자거래진흥원 등 산하기관에서 별다른 경쟁없이 사업을 수주했다.
또 감사원이 지난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6개 이상의 국가 R&D과제를 수주한 대학 교수가 무려 225명으로 이들은 대학에 지원된 전체 자금의 9.2%(1373억원)를 받아갔다.그만큼 독과점이 심하다는 얘기다.서울대의 한 교수는 8개 부처에서 무려 12개 과제를 수주하기도 했다.과기부는 이와 관련,지난해 한때 연구자 한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R&D 과제 수를 5개 이내로 제한하는 방안을 추진했으나 일률적 참여 제한은 곤란하다는 반론에 밀려 도입에 실패했다.
한양대 공대 김모 교수는 "현실적으로 정부 연구비에는 R&D 자체보다는 대학이나 공공연구소의 생계유지용으로 활용되는 게 많고 그러다보니 나눠먹는다는 비판이 나온다"고 말했다.
◆모럴해저드 '연구 하청'
"연구과제를 하청준다는 얘기 혹시 들어보셨나요?" 과학기술 분야 정부출연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얼마 전 연구성과를 평가하는 자리에서 경험한 얘기라며 대뜸 이같이 물었다.
그는 "정부예산을 자그마치 9억원이나 받아놓고 해당 연구과제의 핵심은 전부 외부 용역을 줘서 처리한 사례를 봤다"고 말했다.
이 연구원은 "더 큰 문제는 각종 연줄로 얽혀있을 수밖에 없는 평가위원들이 별다른 이의제기 없이 넘어갔다는 점"이라고 꼬집었다.
그리고 "이런 식이라면 예산이 아무리 늘어난들 R&D가 제대로 이뤄질 수 없다"며 자신이 낸 세금이 이런 R&D 예산으로 쓰이는 게 아깝다고 했다.
대전 대덕연구단지의 한 연구원도 "정부 R&D 연구과제를 수주한 연구기관 가운데는 해당 과제를 직접 연구하지 않고 마감이 임박해 벤처기업에 1000만∼2000만원 정도의 돈을 주고 성과보고서를 만들어달라고 요구하는 사례가 드물지 않다"고 전했다.
이 때문에 대덕단지 내 벤처기업 가운데는 사업화를 위한 독자 연구나 기술개발 없이 하청 연구로 연명하는 곳도 꽤 된다고 그는 소개했다.
◆'먹튀' 연구자 수두룩
한나라당 신상진 의원에 따르면 2005∼2007년 과학기술부가 대학과 공공연구소 등에 자금을 댄 국가지정연구실사업,나노기술개발사업 등의 세부 연구과제 가운데 53건이 성과 없이 중단됐다.
중간 평가에서 탈락한 것도 있지만 연구책임자의 이직이나 면직,해외연수 등으로 사업이 중단된 곳도 상당수에 달한다.
과기부는 이들 사업에 R&D 예산 163억원이 투입됐지만 회수한 자금은 56억원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국민들이 낸 세금 110억원 가까이가 공중으로 사라진 것이다.
한민구 서울대 공대 교수는 "연구지원 결정부터 신중을 기하고 꼭 필요한 연구자에게 예산을 줘야 효율성도 높아진다"고 말했다.
그는 또 "휴대폰만 하더라도 액정,회로기판 등 기술영역이 세분화돼 있는데 휴대폰 과제가 나오면 모두가 달려드는 것이나 유행에 따라 특정분야에 쏠림현상이 나타나는 것도 문제"라며 "그만큼 정부예산을 쓰는 데 대한 책임감이 없다는 방증"이라고 꼬집었다.지난해에만 960억원을 투자한 과기부의 특정기초연구지원사업은 최근 유행을 타고 있는 생명과학 과제를 다룬 분야에 비해 2배나 많이 선정,비판을 받고 있다.
기획취재부=김수언/주용석 기자 indept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