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북한, 문제는 사람과 통계다

김병연(金炳椽) < 서울대 교수·경제학 >

러시아의 국내총생산(GDP)은 1992년 초 자본주의로 체제 이행을 시작한 후 7년 동안 50%나 감소했다.즉 GDP가 반토막 난 것이다.

1929∼1933년 동안 미국의 GDP가 30% 하락한 사건을 대공황이라 부른다면 러시아의 체제이행기 동안의 침체는 초대형 공황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러시아의 초대형 공황의 근저에는 사람과 통계의 문제가 자리잡고 있었다.러시아에는 경제 체제의 이행을 준비한 전문가 그룹이 없었다.

대통령인 옐친은 보드카에는 정통했지만 경제에는 백치였다.

이행 초기에 경제부처 장관,총리에 연이어 임명된 가이다르는 나름대로 자본주의 경제를 이해하는 듯했다.그러나 소련 말기 공산당에서 발행하는 잡지인 '코뮤니스트(공산주의자)'의 편집인을 하다 소련이 붕괴하자 그 잡지의 이름을 '스바보드느예 므이슬(자유 사상)'로 재빨리 바꾼 그도 기회 포착에는 능했지만 경제 운용에는 미숙했다.

결국 그의 총리직 수행도 6개월여의 단명에 그치고 말았다.

소련 사회주의는 막대한 통계자료를 기초로 움직이는 중앙계획경제였다.그러나 통계자료가 엉터리인 경우가 허다했다.

기업들은 보너스를 더 받기 위해 정부에 보고하는 통계자료를 가공했다.

또한 많은 통계자료가 극비로 분류됐다.

심지어는 가계소득에서 저축이 차지하는 비중이나 필수소비재에 지급되는 가격보조금도 극비자료로 분류됐다.

그나마 가용한 통계에의 접근이 차단된 정책결정자들은 실제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정책을 세우고 집행했다.

체코나 헝가리의 경우는 러시아와 크게 달랐다.

1990년대 초 체제이행을 시도한 후에도 GDP의 하락은 20% 미만에 그쳤다.

그리고 3∼4년 후부터는 GDP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사람도 준비돼 있었고 통계의 정확성도 러시아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았기 때문이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로의 전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믿는 일단의 개혁가들이 1980년대 후반부터 정부와 학계에서 세력을 모으고 정기적으로 만나 토의하며 이행의 로드맵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개혁 전문가 그룹의 대표적 인물이 바로 체코의 개혁을 일관성있게 이끌었던 클라우스 현 체코 대통령이었다.

헝가리도 1980년대부터 정부 관료들이 자본주의로의 체제이행을 믿고 준비하는 사람들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학에서는 이미 1970년대에 경제사상사라는 과목을 통해 자본주의 경제사상과 이론을 가르쳤고 1980년대에 이르면 서구 대학에서 사용하는 경제교과서를 사용해 자본주의 경제를 학습했다고 한다.

북한은 러시아의 경우인가? 아니면 체코나 헝가리의 경우인가? 안타깝게도 현재로서는 러시아보다 더 열악한 경우로 판단된다.

북한 정부 관료나 대학,연구소에서 자본주의로의 체제이행을 논의하는 그룹,시장경제를 이해하고 그 쪽으로 나아가는 방안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통계에 관해서는 엉망이 아니라 절망적인 수준이다.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이 매년 발행하던 통계연감을 북한은 1960년대 말부터 아예 발행조차 하지 않고 있다.

지금은 자신들의 GDP조차 일관성있게 추계하지 못하는 형편에 이르렀다.

한국은 북한의 체제이행을 얼마나 잘 준비하고 있는가? 우리는 체제이행에 가장 중요한 사람과 통계의 준비 없이 대북(對北)지원과 남북경협에만 매달려왔다.

이러한 접근에는 남한이 잘 도와주고 설득하면 북한이 잘 알아서 개혁,개방할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도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면서 정부기관은 북한에 관해 제대로 된 기초통계조차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북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남한도 준비돼 있지 않다면 우리에게 통일은 민족적 재앙으로 다가올 수 있다.

준비되지 않은 채 맞게 되는 북한의 체제 이행은 고통을 견뎌야 하는 세대에게 오랫동안 너무 무거운 멍에를 지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