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고객은 봉' 막으려면

해외여행을 나가서 물건 몇 가지를 쇼핑하고는 '비행기값 뽑았다'며 뿌듯해 하는 사람을 주위에서 찾기는 어렵지 않다.

여행사의 해외 가이드들이 손님들을 현지 쇼핑센터로 안내하고는 "잘만 고르시면 여행경비를 건지고도 남을 겁니다"라고 너스레를 떠는 일도 '공식'이 된 지 오래다.한국에서 수입이 전면 자유화된 지가 언젠데,외국에 나가서 물건을 사는 게 '돈 버는 일'로 통하는 현실은 암울하다.

서울의 백화점 매장에서 175만원에 내놓은 버버리 여성용 트렌치코트를 세계적으로 물가가 비싼 도시라는 도쿄의 백화점에서는 13만1250엔(약 109만원)에 살 수 있다.

'명품'에만 거품이 끼어있는 게 아니다.서울에서 30만원이 넘는 가격에 팔리는 먼싱웨어 골프 티셔츠도 도쿄에서는 반값이다.

최근 국내시장 점유율 5%를 넘어섰다는 수입 승용차의 가격 거품은 더 심하다.

도요타의 렉서스 LS460L은 국내에서 1억6300만원에 팔리고 있는데,한국과 똑같이 일본에서 들여다 판매하는 미국에서는 7만2000달러(약 6600만원) 선에 불과하다.특별소비세가 부과되는 등 다른 나라보다 비싼 세금,선진국보다 고급품 시장이 작은 탓에 재고관리 비용이 더 들어간다는 등이 수입판매업자들이 대는 '바가지'의 이유다.

하지만 최근 확대되고 있는 병행수입시장은 이런 논리를 궁색하게 만든다.

지난달 하순부터 수입 승용차 병행수입 판매를 시작한 SK네트웍스는 벤츠,BMW,아우디,렉서스,도요타 등의 승용차를 공식 판매업체보다 10~25% 싸게 팔고 있다.'병행수입'이란 사업자가 공식 수입업체와 다른 유통경로를 거쳐 국내로 들여오는 것을 말하지만,본사 딜러로부터 정품을 들여온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다.

광고 등 마케팅 비용이 덜 들어간다는 점을 빼고는 원가구조에서도 큰 차이가 없다.

일본의 수입품 가격이 한국보다 훨씬 낮은 것은 병행수입 시장이 발전된 덕분이다.

정부가 '수입 공산품의 가격 인하를 유도하기 위해' 병행수입을 합법화한 게 1995년 11월이니,꽤나 '역사'가 오래된 셈이다.

그런데도 터무니 없는 가격 거품이 온존하고 있는 건 누구의 탓일까.

지금까지는 대부분 중소 사업자들이 소규모로 제품을 들여오다보니 사후관리가 소홀했고,위조상품을 눈속임으로 팔고 잠적해버리는 '먹튀' 사례도 적지 않아 병행수입 상품이 신뢰를 받지 못해온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점을 들어 지나치게 까다롭게 통관절차를 규정해 병행수입 시장을 억제해 온 정부에 책임을 묻는 전문가들이 많다.

일본에서 무리없이 자리잡은 병행수입이 한국에서만 유독 말썽을 부릴 까닭은 없다.

이 점에서 SK가 정비 등 애프터서비스 시스템을 갖추고 병행수입 시장에 뛰어든 건 반가운 일이다.

공식 수입업자와 병행수입 사업자 간의 건전한 경쟁을 통해 곳곳에 낀 가격거품을 꺼뜨리는 일을 더이상 미뤄서는 안된다.수입·유통시장을 개방한 결과가 소수 라이선스 수입업자의 배만 불려주고,'봉'이 된 소비자들이 해외 쇼핑센터를 전전하는 일을 언제까지 두고 볼 것인가.

이학영 생활 경제부장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