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살림 소감

李 英 珠 < 사법연수원 교수·부장검사 lyj1@scourt.go.kr >

직장생활이 힘들면 흔히 "때려치우고 농사나 지을까"란 말을 한다.기혼여성에게는 아무래도 농사보다 살림이 대안일 것이다.

나도 "살림이나 할까 보다"는 말을 쉽게 했었다.

그러다 실제로 살림만 할 기회가 있었다.재작년 이맘때다.

마흔이 다 돼 임신을 하니 일선 검찰청에서 동료들이나 사건 관계인들을 대할 일이 민망하고,칠순을 앞둔 시어머니께 또 갓난아이 양육을 부탁드리는 것도 차마 못할 짓이다 싶었다.

거기다 검사란 직업에 대한 개인적 애정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의 능력에 슬슬 회의가 들던 차라 사직까지 고려하다가 주변의 권유로 1년간 육아휴직을 하기로 결정했다.첫째를 낳을 때만 해도 법정 출산휴가 60일조차 채우기 어려웠는데,주위 눈치 보지 않고 육아휴직을 하다니 우리 사회도 많이 변했다.

모처럼 살림 보조에서 주체가 되기로 마음 먹으면서 포부도 알찼다.

넷째에게는 모유 수유를 충분히 하고,큰 애들 공부도 가르치고,간식도 만들어주고,집안 단장하고,틈틈이 영어 공부,독서,운동,아이들과의 대화 등….그러나 중학생인 큰애에게 수학을 가르치려니 조급한 마음에 자꾸 화를 내게 돼 그만두고,애써 빵을 구웠더니 아무도 먹지 않아 며칠 동안 혼자 먹어치운 후 간식 만들기도 그만두는 등 많은 것들을 곧 포기했다.

그 밖의 일들은 어머니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도 갓난아기 돌보면서 밥 차려 먹고,빨래하고,청소하고,장 보고,아이들 숙제ㆍ준비물 도와주다 보면 늘 시간이 모자라고 힘에 부쳤다.

자기 계발은커녕 아이들 이야기에 귀 기울일 여유를 갖기도 어려웠다.

살림은 결코 만만한 대안이 아니란 걸 결혼 15년 만에야 깨닫고,이제 '살림'에 '이나' 같은 조사를 붙여 살림을 폄훼하는 말은 더 이상 안 한다.

짧게나마 살림에 전념해 보니,살림은 다양한 정보수집 능력과 확고한 주관을 토대로 하는 결단,강인한 의지와 체력을 두루 필요로 하는 이른바 멀티태스킹이었다.

그런데 모든 걸 완벽하게 하기는 불가능한 노릇이어서 결국 취사선택 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아이들을 사랑으로 키우려면 관심을 갖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중요하지만,하루 종일 재잘대는 다섯 살배기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기란 사실 불가능하다.그래서 '아직도 가야 할 길'의 저자 스콧 펙은 말을 금지하기,방관하기,들어주는 척하기,아이들이 진짜 들어주길 바라는 부분은 경청하기를 조화롭게 해낼 것을 권하면서,그게 또 쉽지는 않으니 끊임없이 노력하라고 한다.

살림도,직장생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