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논공행상

'논공행상(論功行賞)'이란 말은 '삼국지 오서(吳書) 고담전(顧譚傳)'에 나오는 '논공행상 각유차(論功行賞 各有差,공을 따져 상을 주되 차이를 두다)'에서 비롯됐다.

오(吳)나라 태상 고담이 위(衛)나라 군대를 격파한 장수들에게 상을 내릴 때 기여도에 따라 갑과 을로 나눈 게 그것이다.그러나 고담이 친동생 고승에게 갑을 주자 반대파들이 우르르 나서서 임금에게 "고담이 전공(戰功)을 그릇되게 보고함으로써 임금을 기만하였다"고 상신했다.

사실 확인 절차 없이 문책 당한 고담은 임금의 귀 얇음과 판단 착오를 원망하다 결국 동생과 함께 유배 당해 2년 만에 사망했다.

논공행상은 이렇게 처음부터 비극을 잉태했거니와 기묘사화(己卯士禍)는 그 대표적 사례다.중정반정 이후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세운 핵심세력은 물론 근처에서 어물어물하던 자들까지 자식과 친족을 정국공신으로 등록하려 온갖 수를 썼다.

성희안과 유자광이 매부와 손자의 이름까지 올리려 동원한 방법은 인구에 회자될 정도였다.

성희안은 "어머니가 노하여 돌아누우며 다신 네 얼굴을 보지 않겠다"고 했다는 점을 들어 매부 신수린을 올렸고,유자광은 "나는 예전에 공신 책봉을 받았으니 공을 자손에게 넘겨줄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해 손자 승건에 대한 내락을 받은 뒤 자신은 자동적으로 해당되도록 했다는 것이다.이러다 보니 정국공신 중 종친과 환관을 뺀 106명 중 75%가 몇몇의 친족이었다.

조광조 등은 처음부터 이들 가짜 문제를 제기,중종 14년 마침내 신수린과 유승건 심정 등 76명의 훈호가 삭탈됐다.

그러나 이는 결국 조광조가 역적으로 몰리는 기묘사화를 불러일으켰고 나라를 혼란으로 몰아넣었다.대선이 끝났다.

당선자 진영에선 너도 나도 공을 들이밀며 상을 받으려 할 것이다.

논공행상에 따른 잡음이 일면 상호 신뢰는 물론 조직의 결속력이 떨어지면서 암투로 인한 분란이 초래될 게 뻔하다.당선자와 차기 정부의 성패는 논공행상에 휘둘리지 않고 얼마나 합리적이고 적절한 인사를 해내느냐에 달렸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