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새들도 서해를 떠나고 나면

정끝별 < 시인 · 명지대 교수 >

최근 '날아라,어제보다 조금 더 멀리'란 책을 낸 윤무부 교수는 서해안 유조선 기름참사로 시커멓게 기름범벅이 돼 죽어가는 철새들을 보며 이렇게 울먹였다고 한다."2500㎞를 쉬지도 않고 먹이를 찾아 서해까지 날아왔는데….

그들도 우리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는 식구들인데…."

한 주가,한 달이,한 해가 유난히 턱턱 숨가쁠 때,저 철새들처럼 달려가던 곳이 서해안이다.산낙지를 꿀꺽 삼키고 벌떡 일어서는 지친 소처럼,지칠 대로 지친 몸과 마음이 서해안에 들면 탱탱해지곤 했건만….

내게 서해는 강화도에서부터 시작한다.

동막리의 긴 뻘 낙조 속에서,숭어가 하도 많이 잡혀 절반은 버리고 나왔다는 그 옛날의 '봄숭어 타작'을 상상하기도 하고,강화도 사람들이 한평생 먹어도 물리지 않는다는 그 망둥어 뛰는 모습을 바라보기도 했다.격렬한 사랑과 청춘의 메타포로 다가왔던 격렬비열도를 꿈꾼 적도 있다.

국토의 최서단,행정구역상으로는 충남 태안군 근흥면 가의도리 산28.새가 열을 지어 나는 것 같이 보인다 해서 격렬비열도(格列飛列島)라 이름 붙여졌다는 그 무인도에서 지나간 청춘을 리플레이하며 밤새 내리는 흰눈을 바라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만리포 찍고 천리포 찍고 신두리 사구.빙하기 때부터 형성됐다는 모래언덕을 거닐며 여기가 사막이야? 낙타는 언제 오는 거야? 물었던 적이 있다.연꽃 가득한 두웅습지가 이웃해 있었다.

박(珀)을 넣은 육수에 세발낙지를 산 채로 넣어 끓인 박속낙지탕맛을 기억한다.

그리고,'내 마음의 긴긴 봄날'이 남아있을 것만 같은 춘장대(春長臺) 해수욕장에 차를 세워 놓고 봄햇살에 겨워 깜빡 낮잠에 들기도 했다.

마량포구의 동백숲에 들어 봄날마냥 뚝뚝 떨어지는 동백꽃을 바라본 적도 있다.

온갖 종류의 조개들이 바글대는 조개칼국수를 먹었던가.

주꾸미를 초장에 찍었던가.

해송(海松) 향기 가득했던 안면도의 꽃지 해수욕장은 어린 두 딸이 생전 처음으로 일몰을 봤던 곳이다.

이름을 알 수 없던 겨울철새들이,쏟아지는 검은깨처럼 일제히 날아오르던 장관을 봤던 곳은 간월도였다.

굴밥에 어리굴젓을 비벼먹기도 했다.

변산 해수욕장,격포,모항,그리고 직소폭포,내소사로 이어지는 변산반도! '늙은 줄사철나무 한 그루 뒤로 철렁 갈앉는/변산반도 저 저녁해만 같았으면'('흰 거지 검은 거지' 중)이라는 시를 쓴 적도 있다.

정말이지 해가 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변산반도의 저 저녁해처럼 죽어갈 수 있다면,생각했던 적 있다.

변산의 녹두바지락죽이 다시 먹고 싶다.

내게 서해는 압해도에서 끝이 난다.

진옥빛의 신안 바다와 올망졸망한 섬들이 한눈에 들어왔던 송공산과,논밭에 우뚝 서 있던 선돌 '송장수 지팡이'와,바다와 햇빛과 시간들이 먼지처럼 쌓여있던 저물녘의 염전.세발뻘낙지를 원없이 먹었건만….

내 서해의 시작과 끝,그 한가운데서 기름유출 사고가 일어난 지 23일째다.

내 생의 가장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이 아로새겨진 서해와 서해의 군도들을 떠올리곤 했다.

바닷새들의 날갯짓과 파도의 일렁임과 바람의 끝모름,그 아름다운 것들 너머로 해가 지는 풍경과 더불어.

사상 최악의 이 해양오염사고가 빠르게 복구되고 있다고 호들갑이지만,바다 밑이나 지층의 밑은 어떻게 복구할 것인가.

기름과 유화제가 뒤섞인 저 바닷물과 섬들은? 1만2500t에 달하는 검은 기름을 거둬들인 그 많은 폐기물과 이미 살포된 그 많은 유화제는? 서해를 생업의 터로 삼던 주민들과 몰살당한 해조류 어패류와 저 철새들에게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사람들이 가벼워져야 해요.자꾸만 모으고,높고 넓은 집과 빌딩들을 짓고,큰 차들로 바꾸고 그러다 보니 무거워져 날 수가 없어요." 윤무부 교수의 말이다.

우리의 물과 땅과 공기가 이렇게 자꾸자꾸 '무거워'지다가는,굴이나 게나 새들만 세상을 떠나는 게 아니라 인간마저 떠나야 한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