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해튼 상가엔 이미 '불황증후군'…75%까지 세일해도 손님 안모여

미국 경기침체 현장 르포 (上)
지난 18일 오후 4시 미국 뉴저지주 가든스테이트 쇼핑몰.

메이시백화점 JC페니 노드스톰 니만마커스 등 미국의 대표적 백화점 5개와 내로라하는 200여개 소매업체들이 입주한 미국에서 가장 큰 쇼핑몰이다.안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할인판매(Sale)' 표지판.'70%'는 보통이고 '75%'라고 쓰인 표지판도 곳곳에 붙어 있다.

미국의 대표적 백화점이라는 메이시 백화점.여성용 반코트가 88.99달러다.

정가는 248달러.가격표를 보니 129.99달러로 내렸다가 다시 88.99달러로 인하했다.여기서 10%를 추가 할인해준다는 게 백화점의 설명이다.

물건은 괜찮고 값이 싸니 손님들이 한번쯤은 거들떠본다.

그러나 정작 사가는 사람은 없다.메리디스 크러시라는 손님은 "싼 것은 확실하지만 당장 필요없는 것은 사지 않기로 했다"며 아쉬운 듯 돌아선다.

종업원은 멀찍이서 '그러려니' 하는 표정으로 서 있다.

메이시 백화점 옆의 올드네이비라는 의류매장.문 옆에 75% 세일이라는 표지판이 큼지막하다.그렇지만 매장 안은 한산하다.

넓은 매장 안에 있는 손님이라곤 고작 5명.이들도 특별한 목적이 있어 매장에 들른 것은 아닌 태도다.

이 매장에서 5년째 일한다는 이사벨라 레이니씨는 "75% 할인 판매는 연중 최대폭이지만 올해가 손님이 가장 적다"고 털어놓는다.

몇 집 건너서 고급스러운 외장을 자랑하는 잘레스라는 보석 전문점.이 점포 앞에도 '다이아몬드 30% 할인 판매'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보석도 세일하냐"고 물었더니 "불황에다 금값 폭등으로 보석을 찾는 사람이 아예 자취를 감췄다"는 게 매니저의 하소연이다.

미국의 소비 위축은 현재 진행형이다.

해마다 이맘 때면 소매업체들은 '겨울상품 재고정리 왕창세일'을 실시한다.

올해 다른 점은 할인폭이 평소 60% 수준에서 75%로 높아졌다는 점,그리고 겨울상품이 없는 장난감 업체나 일반 식품 업체까지 왕창세일에 합류했다는 점이다.

할인 판매를 하지 않으면 물건이 팔리지 않으니 아예 세일 경쟁까지 붙었다는 게 관계자들의 얘기다.

쇼핑객이 몰리는 뉴욕 맨해튼 상점도 15년 만에 가장 지독한 불황을 겪고 있다.

물론 모든 소매업체들의 매출이 뚝 떨어졌거나 세일에 나선 것은 아니다.

가든스테이트 쇼핑몰에 입주해 있는 명품 백화점인 니만마커스에서 '할인판매'라는 표지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구찌나 루이비통 등 명품은 할인을 안한다는 게 백화점의 설명이다.


뉴저지주 클로스터에 있는 던킨도너츠 매장에 줄이 길다.

인기 있는 도넛인지라 줄이 긴 것은 이미 익숙한 현상.잠깐 살펴보니 커피를 사가는 사람이 많다.

한 잔에 1.5달러.아르바이트를 하는 제프리 후왕군은 "구체적으로 세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커피가 요즘 많이 팔리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커피는 여전히 스타벅스다.

스타벅스 커피값은 3~5달러.한국보다는 싸지만 이곳에서도 만만치 않은 가격이다.

커피 없이 못사는 미국인들이 스타벅스 대신 값싼 커피를 찾다 보니 던킨도너츠 커피가 잘 팔린다는 게 어느 애널리스트의 설명이다.

실제 스타벅스의 최근 매출은 좋지 않아 1년 전 36달러 하던 주가가 최근에는 18달러로 반토막났다.

커피값까지 아낀다는 게 얼핏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렇지만 사실이다.

지난 17일 낮 12시30분 뉴욕 맨해튼 49번가의 한 델리가게(소규모 잡화점).좁은 가게 안에 사람이 빼곡하다.

샌드위치와 커피 음료수 등까지 파는 곳이라 주변 샐러리맨에게 점심식사로 인기있는 곳이다.

길게 늘어선 줄에서 먹는 데는 불황이 없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웬걸.바쁜 시간이 지나자 이곳 주인인 교민 김모씨는 "델리가게 15년 만에 이런 불황은 처음"이라고 투덜거린다.

"평소 같으면 1인당 10달러씩을 썼는데 지금은 5~7달러로 때운다"는 것."감원 공포에 시달리는 금융회사가 인근에 많은 탓도 있지만 불황치곤 굉장한 불황"이라는 게 김씨의 설명이다.

미국에서 가장 경기를 덜 타는 업종 중 하나가 세탁업이다.

다림질이 서툰 미국인들은 웬만한 불황에도 세탁소는 꼭 찾는다.

그런데 요즘엔 세탁소 경기마저 썰렁해졌다고 한다.

백인 거주 지역인 뉴저지주 프린스턴에서 세차장과 6개의 세탁소를 경영하는 박경우 사장은 "세탁소를 찾는 손님은 줄지 않았지만 이들이 갖고 오는 세탁물은 1인당 평균 10~20개에서 최근엔 5~7개로 줄었다"고 말했다.

이렇듯 주택경기 침체에서 시작한 미국 경기 둔화는 최근 들어 소비 전체의 위축으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의류 보석은 물론 택시 식당 세탁소 세차장 등 거의 모든 소매업종이 고전을 겪고 있다.

박 사장이 느끼기로는 "고용 사정이 나빠진 작년 11월부터 매출이 급속히 위축되더니만 올 들어 그 정도가 심해졌다"고 한다.

특히 "올 들어서는 경기 침체에 대한 우려로 소비심리가 급격하게 위축되고 있다"는 게 박 사장의 분석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주로 소비제품 자영업에 종사하는 한인 교민들의 사정은 더욱 힘들다.

역사 깊은 뉴욕주 우드사이드 한양수퍼마켓과 퀸즈동양식품을 운영하던 한 교민은 이달 초 문을 닫고 잠적했다.

자금난에 시달린 탓이다.

그런가 하면 뉴저지주 대표적 한인식당인 N식당은 장사가 되지 않아 최근 매물로 나오기도 했다.

대표적 내구재인 자동차 판매도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작년 12월 미국의 자동차 판매는 전년동기대비 3% 줄었다.

뉴저지의 한 자동차 딜러는 "상대적으로 양호했던 고급차종 판매도 눈에 띄게 줄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미국의 소비가 한꺼번에 움츠러드는 것은 물론 아니다.

맨해튼의 고급 식당은 아직도 자리잡기가 힘들다.

1인당 100달러가 넘는 뮤지컬이나 미식축구 표는 없어서 못판다.

문제는 중산층 이하 계층이다.

집도 뺏기고 카드 대금도 못내는 가정이 수두룩하다.

신용카드 연체율은 4%를 넘었다.

미국 최대 통신업체인 AT&T의 작년 9월 말 가정용 전화 고객은 3200만회선으로 1년 전에 비해 3.9% 감소했다.

전화요금을 내지 못해 연체도 늘고 있다.

더욱 큰 문제는 심리적 위축이다.

불황이 언제 끝날지 모르다 보니 일단 쓰지 말고 보자는 심리가 확산되고 있다.

올 소매판매 실적이 1991년 이후 17년 만에 처음으로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맨해튼에서 뉴저지주로 건너오는 팰리세이드 파크웨이.스노코란 정유소에 차들이 늘어서 있다.

뉴욕주보다 뉴저지주가 휘발유값이 싸다 보니 항상 붐비는 주유소다.벌써 15분째 줄을 서 있다는 뉴욕 주민 브라이언 매케프씨는 "올해부터 이 주유소를 이용하고 있다"며 "생각보다 오래 이용해야 할 것 같다"고 싱겁게 웃었다.

뉴욕=하영춘 특파원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