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완화 이렇게‥] (中) 고정된 사고를 버려라‥법.조직 칸막이 다 헐어야

4년을 기다려야 했다. KT가 인터넷TV(IPTV)인 '메가TV'의 준비를 마친 것은 2003년 말. 인터넷 선과 TV 수상기 사이를 연결하는 셋톱박스 개발작업이 끝났고,내부 시험망을 통해 다채널과 양방향 기능에 대한 테스트도 마쳤다. 서비스만 시작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방송위원회와 정보통신부가 법제정을 미뤄둔 채 IPTV를 놓고 "방송이다" "통신이다"라며 다투는 통에 허송세월해야 했다. 이유는 물론 두 정부부처가 IPTV를 제 영향권 안에 두기 위해서였다.KT와 하나로텔레콤은 기다리다 못해 일단 서비스를 시작했다. 하지만 KBS 9시뉴스나 MBC 드라마를 실시간으로 볼 수 없는 '반쪽짜리 서비스'였다. 기존 법규에 맞춘 '기형적 IPTV'다.

IPTV를 법제화한 '인터넷 멀티미디어 방송법'은 2007년 12월 어렵사리 국회를 통과했다. 사업자가 허가를 받아서 실시간 방송을 포함한 '진짜 IPTV'를 방송하려면 오는 9월께나 돼야 한다. "2003년에 IPTV를 시작할 수 있었다면 당시 유행했던 한류문화와 접목해 매우 큰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었는데 타이밍을 놓쳤다"(KT 관계자)는 아쉬움도 나온다.

DMB의 사정은 더욱 심각하다. 이동방송에 대한 길고 긴 논란 끝에 2005년 12월 지상파DMB 서비스를 시작했지만 업체들의 피해가 컸다. 300개가 넘던 DMB 단말기와 부품 관련 중소업체가 100여개로 줄었다. 서승모 IT벤처기업연합회 회장은 "DMB 서비스가 늦어지면서 수백개 중소벤처기업이 도산 또는 휴.폐업상태"라고 말했다.방송과 통신의 융합서비스인 IPTV와 DMB는 융합추세에 법과 제도가 따라가지 못한 대표적인 사례다. 그동안 어느 부처에서,어느 법으로 처리할지 여부가 정해지지 않아 첨단기술이 시장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표류했다. IPTV의 경우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빨리 상용화할 수도 있었지만 미국 유럽 홍콩 등이 앞서가고 말았다. 한국이 놀고 있는 사이 세계 211개 업체가 서비스 경쟁을 벌이고 있다. 애써 개발한 첨단기술은 당연히 구닥다리 기술이 돼버리고 말았다.

방송과 통신은 물론 정보기술(IT)과 바이오기술(BT) 나노기술(NT) 문화기술(CT) 환경기술(ET) 항공기술(ST) 등은 '융합(convergence)'이라는 트렌드를 형성하고 있다. 한 개 팀이나 본부가 맡아 처리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정부조직을 상품이나 업종별로 나눈 '칸막이 규제'가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때문에 정부조직부터 융합추세에 알맞게 재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런 측면에서 산업자원부 정보통신부 과학기술부의 유관 업무를 지식경제부로 통.폐합시키기로 한 것은 매우 시의적절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법체계도 융합추세에 맞게 뜯어고쳐야 한다. 전기통신사업법 나노기술촉진법 생명공학육성법 등을 통합해야 융합산업을 체계적으로 지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기식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IT기술전략연구단장은 "융.복합 산업규제 체계를 통합하기 위해 디지털컨버전스법(가칭) 등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융합추세에 따라 규제를 푼다고 하면서 또 다른 규제를 양산하는 '대체규제'도 우려된다. 정통부는 통신요금 인가제를 폐지하는 대신 재판매를 활성화한다는 명분으로 통신사업자와 재판매사업자 간 도매규제를 도입할 예정이다. 자칫 '총을 없애기로 해놓고 장총을 권총으로 바꾸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우려되는 대목이다.

방송-통신 융합시대에는 기업 인수합병(M&A)을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규제를 풀어야 한다. SK텔레콤이 하나로텔레콤을 인수하고,LG데이콤이 LG파워콤을 합병하는 등 유.무선회사 간 M&A는 시대적인 흐름이다. 유럽에선 핀란드와 스웨덴 1위 이동통신 사업자끼리 국경을 넘어서 합병한 사례(소네라+텔리아)까지 등장했다.

이주선 한국경제연구원 기업연구본부장은 "새로운 융합환경에 맞춰 지속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방향으로 규제가 완화돼야 한다"면서 "방송 통신분야에서도 지분율 제한 등에서 벗어나 미디어점유율 등 새로운 기준을 도입하고,사업자에게 부담을 주는 각종 출연금도 폐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명수 기자 ma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