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代를 잇는 家業] (1) 말표산업 ‥ 光내온 41년 외길 '구두약 名家' 명성

"창업보다 힘든 게 수성(守城)이지요.

" 자수성가형 중소기업인들은 기업승계에 걱정이 많다.우리나라는 기업경영 여건이 열악해서다.

일본이나 유럽과 달리 기업 역사도 일천하다.

창업한 사업을 2세,3세 등이 물려받아 '한우물 가업'을 지키는 사례를 시리즈로 소개한다.말표구두약은 1967년 국산 최초의 구두약으로 세상에 선을 보인 뒤 현재도 연간 1300만개가 팔릴 정도로 국내 구두약 시장을 점유하고 있다.

군납업자이던 고 정두화씨가 1955년 창업한 말표산업은 1988년 아들인 정연수 현 대표에게 경영이 승계됐다.아들은 말표구두약의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사업영역을 넓혀 자동차 용품,가정용 왁스,세제 등으로 진출했다.

그러나 41년간 본업인 구두약에서 한눈 파는 일은 없었다.지금도 많진 않지만 연간 180억원 (구두약매출 130억원 포함)의 매출을 올리고 세계 10여개국에 구두약을 수출하고 있다.말표산업은 정연수 대표의 아들(정홍교.27)로 3대째 사업을 이어갈 예정이다.◆창업자 정두화-미제 구두약 보고 국산화 결심

정두화씨가 처음부터 구두약을 만든 것은 아니었다.어린 시절 머슴살이를 하면서 두부,콩나물을 만들어 판 게 사업의 시작이었다.1955년 말표산업의 전신인 태양사를 세워 친구와 군납업에 뛰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사업을 벌였다.

그러던 정씨는 1965년 구두닦이들이 미제 구두약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우리나라가 저런 것 하나도 못 만드나 하는 생각에 구두약을 만들기로 결심했다.군납사업으로 인연을 맺은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군납 당시 25사단참모장)이 그 시절 유명하던 일본의 '3H 구두약'으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을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줬다.이를 계기로 2년 뒤에 자체 기술로 구두약을 내놓는 데 성공했다.

'말표'라는 상표도 박태준씨가 이름을 지어줬다.당시엔 말가죽 구두를 최고로 쳤다.이렇게 탄생한 말표구두약은 몇 년 안에 국내에서 외제 구두약을 완전히 밀어냈다.그때부터 구두약 하면 '말표'라는 공식이 생겨났다.지금도 군용으로 납품되는 구두약은 전부 말표다.

정두화씨는 고집스러울 만큼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고 아들 정연수 대표는 회고했다.초기 몇 년을 제외하고는 절대 광고를 하지 않았다."광고비용을 소비자에게 부담시키느니 차라리 그 돈으로 품질을 높이겠다"는 경영철학 때문이었다.직원과 자식들에겐 "사람이 늘 착하게만 살 수는 없지만 정직함은 잊지 말아야 한다"고 항상 강조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돈이 궁할 때는 대가 없이 돈을 줄 만큼 후했지만 자식들에게는 혹독하리만큼 인색했다.아들 연수씨는 "하도 용돈을 안 주니까 청바지를 도매로 떼어다 팔아서 돈을 마련하기도 했다"며 "아마도 자식들에게 돈이 얼마나 귀한지를 알려주려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창업자는 말표구두약이 한참 인기를 끌던 1970년대 초 53세의 나이로 돌연 사업에서 은퇴했다.사라져가는 전통 장맛을 안타까워 하던 그는 전통 장류 보존사업과 장학회 등 농촌사업으로 여생을 보내기로 했다.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삼성리에 수진원(修眞園)이라는 농장을 지었다.이후 2006년 작고하기 전까지 전통 장류를 지키는 장인으로도 이름을 남겼다.

◆2대 정연수-선배들 땀으로 먹고살 수는 없다

창업자는 차남인 정연수씨를 후계자로 낙점했다.매사 긍정적이고 아버지에게 의지하지 않으려는 자세가 아버지의 눈에 들었다.정 대표는 대학을 졸업하고 학교 선배와 식품납품업을 동업했다.그는 차남인 데다 하던 사업이 그런 대로 순항했고 큰 사업을 할 재목이 못 된다고 여긴 터라 기업을 물려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은퇴 후 10년 가까이 전문경영인에 회사 경영을 맡겼던 부친으로부터 1980년 뜻밖에 입사 제의를 받았다.아버지의 엄명을 거스를 수 없어 사업을 물려받게 됐다.정 대표는 1988년 대표에 취임하기까지 구두닦이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영업하고 공장에서 여공들과 구두약 생산작업을 하면서 경영수업을 받았다.

정 대표는 취임 이후 미래의 먹거리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소득이 늘고 한 사람이 몇 켤레씩 구두를 갖게 되면서 구두약 판매가 정체를 보여서다.

이를 절감한 그는 가정용 왁스,세제,자동차용품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우선 1992년 경기도 남양주시 덕소에 있던 본사와 공장을 현재의 인천 남동공단으로 확장 이전하고,1995년에는 중국 단둥에 합작투자 회사도 세웠다.1998년에는 가정 및 건물용 광택제와 세제를 세계 최대 가정용품 제조사인 미국의 존슨사에 공급하는 제휴계약을 맺기도 했다.구두약을 세계 10여개국에 수출하게 된 것도 이때의 성과다.최근에는 전량 일본에서 수입해오던 발광다이오드(OLED) 소자용 자체발광물질인 '유기EL'을 생산,삼성SDI에 납품하고 있다.

임기훈 기자 shagg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