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라노 김영미 "내안의 틀 깼더니 음색도 트이더군요"

1981년 겨울 뉴욕에서 열린 제1회 루치아노 파바로티 국제성악콩쿠르.

54㎏의 동양 처녀가 오페라 '라 보엠' 가운데 미미의 아리아를 불렀다.갓 27세를 넘긴 풋내기 소프라노가 어느 프로 성악가보다 풍성한 벨칸토('아름다운 소리'라는 뜻) 창법을 뿜어냈다.심사위원석에 앉아 있던 파바로티가 탄성을 질렀다.

"도대체 누구한테 배웠나? 호흡의 연결이 기가 막히게 좋다!"

소프라노 김영미씨(54)가 콩쿠르가 아닌 프로의 길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그는 바로 다음 해 파바로티의 상대역으로 오페라 '사랑의 묘약'의 무대에 섰다.

스타 소프라노인 김영미 한국예술종합학교 성악과 교수가 1978년 세종문화회관에서 '라 보엠'으로 데뷔한 뒤 올해로 오페라 인생 30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해 내달 8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오페라 30년,벨칸토 30년'이라는 이름으로 독창회를 연다.그는 '해외 진출 1세대 소프라노'로도 불린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이탈리아 산타 체칠리아 음악학교에 진학,1977년부터 베로나 콩쿠르,푸치니 콩쿠르,마리아 칼라스 국제 콩쿠르 등에 잇따라 입상했다.

이후 1992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귀국할 때까지 필라델피아,휴스턴,뉴욕 등 미국 전역에서 오페라 가수로 이름을 날렸다.하지만 그가 말하는 해외 활동의 첫번째 조건은 '노래'가 아니라 '언어'다.

성악가로서 이름을 날리려면 오페라 무대에 서야 하는데,오페라 또한 극이기 때문에 언어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연기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산타 체칠리아 음악학교에 다닐 때 정말 눈물을 흘리면서 공부했어요.

남들이 한 시간에 50쪽을 공부하면 난 2쪽밖에 할 수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시절을 거치면서 외국어가 부쩍 늘었어요."

좀 더 해외 활동을 하지 못한 아쉬움은 없을까.

그는 국내 활동으로 오히려 자기 음악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었다고 말한다.

해외에서 오페라 가수로 활동하며 수많은 연출가와 부딪히는 과정에서 음악에 몰입하기보다는 주변 상황에 더 신경을 쓰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끔찍하게 연습합니다.

도태되지 않기 위한 자신과의 싸움이죠."

최근 들어선 저음이 풍성해지고 포르테('세게'를 뜻함)를 부를 때도 훨씬 여유가 생겼다.

성악가로서 제자들에게 배우는 점도 많다.

주체 못하는 젊음의 혈기와 부딪히면서 자기 안의 틀을 지금도 깨나가고 있다.

한국의 간판 소프라노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그에게는 아직도 이루지 못한 꿈이 있다.

자신의 혼신을 모두 담은 음반을 내는 것이다.

"이젠 기다릴 시간이 없다는 걸 알아요.더 늦기 전에 아리아 모음부터 크로스오버곡까지 제가 잘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그 안에 담고 싶어요."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