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40년만의 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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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재 < 논설위원ㆍ경제교육연구소장 >
어제 경제학과를 비롯한 일단의 서울대 교수들이 대운하 반대 행동계획에 돌입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지난 60년대 말 경부고속도로 반대운동을 벌인 지 거의 40년 만이지 싶다.
당시 변형윤 교수 등 소위 지식인 그룹은 경부고속도로가 환경을 파괴하고 낭비적이며 대다수 국민이 아닌 극소수 부자들만을 위한 것이라며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때마침 프랑스와 독일을 진원지로 한 학생운동이 세계 각국의 정치권을 흔들던 와중이었다.3선 개헌이며 유신헌법이 준비되던 과정에 있었으니 개발독재에 대한 반대는 곧바로 경부고속도로 반대 열풍으로 옮겨붙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일이라고 해야 맞을 테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의 최근 증언에 의하면 그때 고속도로 건설에 반대했던 것이 학자들만도 아니었던 모양이다.주무 장관인 건설부 장관을 제외한 거의 모든 관료들도 반대였었다니 실로 감회가 무상하다.
후진국 개발 기구였던 IBRD도 경제성이 없다며 반대했으니 긴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다.이들은 왜 고속도로 건설에 반대했을까.
시멘트를 쳐바르고 산허리를 깨뭉개며 안온한 농촌 도시의 중심부를 가로질러 굉음을 내며 내달리는 고속도로라는 것 자체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더구나 변형윤 교수의 주장대로 당시 한국 사람 중에 자가용 가진 사람이 몇명이나 된다고 농민들이 허리를 굽혀 땀흘리며 일하는 농토를 가로질러 길을 낸단 말인가.
기어이 길을 닦아 놓으면 소수의 부자들이 그들의 젊은 처첩들을 옆자리에 태우고 전국을 놀러다니는 유람로가 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러니 당치 않다는 것이 골자였다.
이런 간단 명료한 주장만으로도 수많은 대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때 현대건설에서 일하던 약관의 이명박 사원이 40년이 지난 지금 대운하를 추진하겠다며 대통령이 되어있고 변 교수의 제자였던 그때의 학생들이 지금은 대학교수가 되어 다시 대운하 반대운동에 뛰어들었다.
실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서울대의 대운하 반대 운동그룹의 좌장격인 이준구 교수는 얼마 전에 "경제성 평가란 것은 고무줄과 같아서 정확한 계산이 어렵다"고 했다.
그런데 계산이 안된다는 것은 또 무엇이며 그렇다면 반대운동의 근거는 또 무엇인지 종잡기 어렵다.
일제(日帝)가 들어와 전국에 신작로를 낸 것을 두고 얼마나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한국의 전통적인 오솔길을 그리워했는지 모르겠지만 바로 그것으로 해방 후 한국은 산업화의 젖줄로 삼았던 것도 부인할 수만은 없다.
이것은 자연의 간계(奸計:cunning of reason)라는 철학 용어를 빌려와야만 비로소 설명이 되는 일이다.
역사는 이처럼 때로 멀쩡한 사람의 계산만으로는 예측하기 어려운 오묘한 계획을 진행시키기도 하는 모양이다.
대운하 반대론자들이 전면에 내세우는 환경보호라는 것도 그 역사가 비슷하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68년 문화혁명의 깃발이 오른 직후인 70년대 초에 '성장의 한계'론이 공식화되었고 이후 산업화 자체를 부정하는 지구종말적 예언들이 환경보호론의 외피를 입고 지금까지 맹위를 떨쳐왔다.
우리가 아는 소위 진보적 가치라는 것이 시장경제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요 유럽 대학이 경쟁이라는 단어를 폐기하고 평준화의 깃발을 올린 것도 이 운동의 결과물이었다.
어제 서울대 교수들이 치켜든 대운하 반대 깃발을 보며 40년 세월의 화살같음을 느끼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은 새로 개통된 경부고속도로에 막걸리를 따라 올리는 실로 정감 넘치는 기념식을 가졌었다.이명박 대통령은 21세기 한국인의 꿈을 실은 배를 대운하에 띄울 수 있을 것인가.
jkj@hankyung.com
어제 경제학과를 비롯한 일단의 서울대 교수들이 대운하 반대 행동계획에 돌입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지난 60년대 말 경부고속도로 반대운동을 벌인 지 거의 40년 만이지 싶다.
당시 변형윤 교수 등 소위 지식인 그룹은 경부고속도로가 환경을 파괴하고 낭비적이며 대다수 국민이 아닌 극소수 부자들만을 위한 것이라며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때마침 프랑스와 독일을 진원지로 한 학생운동이 세계 각국의 정치권을 흔들던 와중이었다.3선 개헌이며 유신헌법이 준비되던 과정에 있었으니 개발독재에 대한 반대는 곧바로 경부고속도로 반대 열풍으로 옮겨붙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일이라고 해야 맞을 테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의 최근 증언에 의하면 그때 고속도로 건설에 반대했던 것이 학자들만도 아니었던 모양이다.주무 장관인 건설부 장관을 제외한 거의 모든 관료들도 반대였었다니 실로 감회가 무상하다.
후진국 개발 기구였던 IBRD도 경제성이 없다며 반대했으니 긴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다.이들은 왜 고속도로 건설에 반대했을까.
시멘트를 쳐바르고 산허리를 깨뭉개며 안온한 농촌 도시의 중심부를 가로질러 굉음을 내며 내달리는 고속도로라는 것 자체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더구나 변형윤 교수의 주장대로 당시 한국 사람 중에 자가용 가진 사람이 몇명이나 된다고 농민들이 허리를 굽혀 땀흘리며 일하는 농토를 가로질러 길을 낸단 말인가.
기어이 길을 닦아 놓으면 소수의 부자들이 그들의 젊은 처첩들을 옆자리에 태우고 전국을 놀러다니는 유람로가 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러니 당치 않다는 것이 골자였다.
이런 간단 명료한 주장만으로도 수많은 대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때 현대건설에서 일하던 약관의 이명박 사원이 40년이 지난 지금 대운하를 추진하겠다며 대통령이 되어있고 변 교수의 제자였던 그때의 학생들이 지금은 대학교수가 되어 다시 대운하 반대운동에 뛰어들었다.
실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서울대의 대운하 반대 운동그룹의 좌장격인 이준구 교수는 얼마 전에 "경제성 평가란 것은 고무줄과 같아서 정확한 계산이 어렵다"고 했다.
그런데 계산이 안된다는 것은 또 무엇이며 그렇다면 반대운동의 근거는 또 무엇인지 종잡기 어렵다.
일제(日帝)가 들어와 전국에 신작로를 낸 것을 두고 얼마나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한국의 전통적인 오솔길을 그리워했는지 모르겠지만 바로 그것으로 해방 후 한국은 산업화의 젖줄로 삼았던 것도 부인할 수만은 없다.
이것은 자연의 간계(奸計:cunning of reason)라는 철학 용어를 빌려와야만 비로소 설명이 되는 일이다.
역사는 이처럼 때로 멀쩡한 사람의 계산만으로는 예측하기 어려운 오묘한 계획을 진행시키기도 하는 모양이다.
대운하 반대론자들이 전면에 내세우는 환경보호라는 것도 그 역사가 비슷하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68년 문화혁명의 깃발이 오른 직후인 70년대 초에 '성장의 한계'론이 공식화되었고 이후 산업화 자체를 부정하는 지구종말적 예언들이 환경보호론의 외피를 입고 지금까지 맹위를 떨쳐왔다.
우리가 아는 소위 진보적 가치라는 것이 시장경제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요 유럽 대학이 경쟁이라는 단어를 폐기하고 평준화의 깃발을 올린 것도 이 운동의 결과물이었다.
어제 서울대 교수들이 치켜든 대운하 반대 깃발을 보며 40년 세월의 화살같음을 느끼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은 새로 개통된 경부고속도로에 막걸리를 따라 올리는 실로 정감 넘치는 기념식을 가졌었다.이명박 대통령은 21세기 한국인의 꿈을 실은 배를 대운하에 띄울 수 있을 것인가.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