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여록] 신문고를 끌어내려라

청와대 출입기자단이 상주하는 춘추관 2층에는 '뜬금없이' 큰 북이 있다.

지름이 2m3cm, 몸통 길이가 2m30cm나 되는 대형 북이다.무형문화재 12호인 김관식씨(54)가 1990년 춘추관 개관에 맞춰 소 두마리분 가죽을 써서 만든 작품이다.

제작비만 1억5000만원이 들어갔다고 한다.

북통에 용이 그려져 있다 해서 정식 명칭은 '용고(龍鼓)'다. 일반인들에게는 신문고(申聞鼓)로 더 잘 알려져 있다.신문고라면 조선시대 백성들이 나라님에게 억울함을 호소할 때 쳤다는 의사소통 채널이다.

그러나 이 물건은 나라님 외에는 사용된 적이 없다.

노태우,김영삼 대통령이 '신문의 날'에 춘추관에 들러 한 번씩 친 것을 빼고는 일반인이 북을 두드렸다는 기록이 없다.그럴 수밖에 없다.

우선 북의 위치가 문제다.

신문고를 치려면 삼엄한 경비가 펼쳐지는 청와대 입구를 지나,춘추관 입구에서 다시 한번 "누구시냐"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그게 다가 아니다.

춘추관 2층에 가려면 1층에서 방문이유서를 작성해야 한다.

출입 목적과 만날 사람,소속 기관,성명,주소,주민등록번호를 꼼꼼히 적고 신분증까지 맡겨야 한다.

사실상 일반인들에게는 접근금지다.

청와대는 그 이유를 북의 설치 목적이 '전시용'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춘추관 출입 기자들이 시민들의 목소리를 잘 전달하라는 기원에서 상징적으로 전시해 놓은 것이지 '민원 제기'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청와대 본관 앞 분수대 근처에 있는 또 다른 신문고(종로구청 관할)도 마찬가지다.

'이 북은 전시용입니다.

두드리거나 울릴 수 없습니다.

OFF LIMIT(접근금지).종로구청장'이란 큼지막한 팻말이 관광객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비싼 돈을 들여 만든 작품을 이렇게 놀릴 필요가 있을까.

특히 창조적 실용을 강조하는 이명박 정부에서 말이다.

소음 때문에 업무에 지장을 받는다면 그 북을 민원제기 부서로 옮겨 상징성을 갖게 한다거나,최소한 춘추관 문 밖으로 내놓아 관광객들의 사진배경으로라도 활용하면 어떨까.그것이 기자들의 무관심과 흡연 속에서 짓밟힌 신문고의 자존심을 살려주는 길이 될지 모르겠다.

박수진 정치부 기자 notwom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