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몬 JP모건 CEO, 10년전 씨티서 '팽'…이제 월가 구원투수로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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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전 씨티서 '팽' 당해지난 13일 오후 자신의 52번째 생일 파티를 즐기던 JP모건체이스의 제임스 다이몬 회장 겸 CEO(최고경영자)는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미국 5위 투자은행인 베어스턴스가 유동성 위기에 빠져 파산에 몰렸다는 소식이었다.그는 즉시 베어스턴스의 '백기사'로 나섰다.
FRB로부터 자금을 빌려 베어스턴스에 지원하는 구제금융 창구 역할을 자처한 것이다.
그는 주말내내 협상 테이블에 앉았고 일요일인 16일 베어스턴스를 주당 2달러(2억3600만달러)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그의 이름 앞엔 '월가의 구원자'란 화려한 수식어가 붙었다.
한때 월가에서 밀려나 변방을 떠돌았던 그에겐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10년 전 씨티그룹 내 권력 투쟁에서 밀려 와신상담한 뒤 미국 5위 상업은행인 뱅크원 CEO를 거쳐 JP모건체이스에서 권토중래의 발판을 마련한 다이몬은 서브프라임 사태를 기회로 이용하는 뛰어난 경영능력을 발휘,미국 금융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로 떠올랐다.뉴욕 태생인 다이몬은 매사추세츠주 터프츠대에서 생물학과 경제학을 전공하고 하버드대에서 MBA(경영학석사)를 마쳤다.
1982년 졸업 후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의 입사 제안을 거절하고 카드사인 아메리칸 익스프레스행을 택했다.
그를 눈여겨본 샌디 웨일 당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사장이 개인비서로 영입한 것이다.다이몬은 이때부터 웨일과 손발을 맞췄다.
1985년 웨일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를 떠날 때도 그를 뒤따랐다.
1998년 트래블러스 그룹과 씨티코프의 통합작업도 공동 주도했다.
웨일이 씨티그룹 회장 겸 CEO에 오르며 '금융 황제'로 등극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를 웨일의 후계자로 지목했다.
그러나 하늘 아래 황제는 둘일 수 없었다.
웨일 회장이 씨티그룹의 권력을 장악해 나가는 과정에서 잦은 의견충돌이 발생,결국 월가를 떠나야 하는 신세가 됐다.
일종의 '토사구팽'을 당한 셈.당시 다이몬은 "나는 웨일에게 쫓겨났다"며 "나를 밀어낸 경쟁자들이 피를 흘리기를 원한다"고 독기를 품었다.
씨티에서 '팽' 당한 뒤 한동안 야인으로 떠돌던 그는 2000년 시카고에 있는 뱅크원 CEO직을 맡아 부활을 알렸다.
취임하자마자 7000여명을 해고하고 수십억달러의 부실채권을 정리하며 적자에 허덕이던 뱅크원을 흑자로 반전시켰다.
2004년 JP모건체이스와 뱅크원의 합병을 통해 다시 월가로 복귀했다.
2005년엔 JP모건의 CEO가 됐으며 2007년엔 회장직에 올랐다.
그는 지난 여름 어려움에 빠진 건자재 유통업체 홈디포의 사업부 매각을 도우며 월가 백기사로서 JP모건의 명성을 이어갔다.
20세기 초 FRB가 아직 설립되지 않았던 시절,JP모건은 미국의 중앙은행 역할을 맡았었다.
1907년 미국 은행들이 집단 파산에 직면하자 은행가들을 불러모아 구제금융을 주선해 불을 끈 것은 JP모건의 창립자인 존 피어폰트 모건이었다.
이번에 FRB 및 미 재무부와의 공조를 통해 베어스턴스를 인수함으로써 다이몬의 영향력은 더욱 공고해졌다는 평가다.
다이몬은 올초 JP모건체이스 실적발표에서 "기업 인수에 매우 개방된 자세를 갖고 있다"며 적극적인 M&A(인수ㆍ합병) 행보를 예고했다.
그가 내친김에 서브프라임 사태로 휘청거리는 씨티그룹을 인수할 것이란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다이몬의 씨티에 대한 '애증'관계로 봤을 때 낭설만이 아닐 수 있다는 지적이다.JP모건의 시가총액은 서브프라임 부실로 몸살을 앓고 있는 씨티그룹을 이미 제친 상태다.
유병연 기자 yoob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