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의 잔' 비웠더니 여유·문화가 찰랑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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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은 내게 인생 2막을 열어주었습니다."
기업인,교수,고위 공직자로 남부럽지 않게 살다가 물러난 뒤 와인으로 인생 2막을 연 사람들이 화제다.'와인 마니아'에서 '와인 사업가'로 변신한 게 공통점이다.
이들은 "성공만을 향해 달려온 '인생 1막'에서 얻을 수 없었던 여유와 문화를 '와인 인생'에서 찾을 수 있었다"고 입을 모은다.
건축설계사이자 한양대 건축과 겸임교수를 지낸 이상황씨(49)는 2004년 서울 대치동에서 와인 레스토랑 '베레종'을 개설,운영 중이다.지금도 명지대에 출강하고 있는 이씨는 "교수는 파트타임일 뿐이고 와인 레스토랑 운영이 주업"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구덕모 전 LG디스플레이 부사장(59)은 서울 청담동에서 와인 레스토랑 '와인&프렌즈'를 운영한다.
오후 5시에 나와 밤 12시에 퇴근하는 그의 삶은 기업인 시절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경제·경영잡지 대신 와인잡지를 애독하는 게 달라진 일상을 대변한다.
최훈 보르도와인아카데미 원장(72)은 철도청장까지 지낸 고위 관료 출신.월간지 '와인리뷰' 발행인이자 와인 전문서를 5권이나 낸 저술가로 유명세를 타 외부 강연 일정이 빠듯하다.
"나는 인생 1막을 공무원으로 살았을 뿐"이라고 강조하는 최 원장.그는 전 철도청장보다는 와인아카데미 원장이라고 불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와인으로 은퇴 준비를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
박인출 예치과 원장(56)은 지난해 병원 로비에 와인바를 차린 데 이어 올 들어서는 직접 와인 수입업에 도전장을 냈다.
지난 2월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의 와이너리 20군데를 직접 방문,걸기쉬 화이트와인 등 10여종을 들여오기로 했다.
"나파밸리 와인은 젊고 사각사각하다"고 말하는 그는 이미 와인전문가가 돼 있다.
이들 모두 와인 마니아에서 와인 사업가로 변신하는 데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렇지만 '인생 1막'을 성공으로 이끈 주인공답게 한 번 결심한 후엔 거침없이 몰입했다는 설명이다.
이상황씨는 "건축에서 느끼지 못한 문화코드를 와인 비즈니스에서 깨우쳤다"며 "흥과 돈을 함께 얻은 셈"이라고 말했다.
구덕모씨도 "경영자 시절에는 가족들과 단답형으로만 얘기했는데 지금은 진짜 대화를 한다"며 "과거엔 큰 성취감을 좇았지만 지금은 작은 것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설명했다.
와인이 자신의 인생을 바꾼 이유에 대해 이들은 와인이 단순한 술이 아니라 여유와 문화 그 자체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입을 모은다.최훈 원장은 "와인을 접하면서 하나의 문화를 지탱해 나간다는 소명감과 성취감이 생겨 마지막 정열을 와인 비즈니스에 쏟아붓고 있다"고 말했다.
정지영/안상미 기자 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