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이슈 분석] "인플레 치유 못하면 사회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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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는 인플레이션의 역사였다.'
경제학자이자 사회철학자인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의 얘기다.실제로 인플레이션은 화폐의 등장 이래 세계 도처에서 기승을 부렸다.
인플레이션의 자취는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그리스 정복자인 알렉산더 대왕 사후에 마케도니아가 분열되면서 물가가 뛰고 그리스 은화인 드라크마의 구매력이 곤두박칠쳐 민생이 피폐했다는 기록이 있다.한국 근대사에도 19세기 말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재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당백전을 대규모로 찍어내면서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한 사례가 있다.
1차 세계대전 후 독일에서 발생한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은 '하이퍼 인플레이션'의 공포를 각인시킨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독일이 1차 대전에서 패하자 연합국은 독일에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했다.배상금을 갚느라 재정적자가 확대된 독일 정부는 화폐 발행을 늘려 재정적자를 메웠다.
이로 인해 통화량이 팽창하면서 물가는 뛰고 마르크화는 휴지조각이 됐다.
1922년 5월 1마르크였던 신문 한 부 가격은 1년여 후인 1923년 9월 1000마르크로 1000배나 뛰었다.이어 신문값이 100만마르크로 다시 1000배가 뛰는 데엔 한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당시 화폐 가치가 곤두박질치면서 액면가 100조마르크 지폐가 발행됐을 정도다.
또 2차 대전 직후인 1946년 헝가리에선 무려 4200조%에 달하는 사상 최악의 슈퍼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당시 물가는 15시간마다 두 배로 뛰었다.
근래에 들어서도 △1985년 볼리비아 △1989년 아르헨티나 △1992년 러시아 △1993년 브라질에서 연간 1500~2만5000%에 이르는 인플레이션 사태를 경험했다.
이 같은 슈퍼 인플레이션은 경제뿐 아니라 심각한 정치·사회적 폐해를 몰고 온다.
1차 대전 이후 러시아와 독일에서 발생한 하이퍼 인플레이션은 러시아에선 공산주의가,독일에선 나치즘이 등장하는 계기가 됐다.
중국에서도 장제스의 국민당이 지배하던 1947~49년 발생한 물가 폭등은 중국 공산당이 권력을 잡는 기회로 활용됐다.
브라질도 1954년 물가상승률이 연 100%에 달했을 때 군사정권이 등장했다.
1976년 아르헨티나의 이사벨 페론 정권이 군부에 의해 전복된 것도 극심한 인플레이션 때문이었다.
시장자유주의 경제학의 대부인 밀턴 프리드먼은 "인플레이션은 경제의 치명적인 질병"이라며 "제때에 치유하지 못하면 사회 전체를 붕괴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1970년대 두 차례의 오일쇼크는 '비용 인플레이션(cost-push inflation)'의 전형을 보여줬다.
비용 인플레이션이란 수요가 많아서가 아니라 생산비용 상승으로 물가가 오르는 현상을 말한다.
1973년 아랍과 이스라엘 간 전쟁으로 촉발된 '1차 오일쇼크' 당시 배럴당 3달러였던 유가는 10달러를 뚫고 12달러까지 단숨에 네 배로 치솟았다.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이 불러온 '2차 오일쇼크'는 유가를 24달러로 두 배 올렸다.
두 차례에 걸친 석유파동으로 세계 경제는 연평균 9%의 물가상승률을 겪었다.
1990년대 이후 세계 경제는 물가상승세가 둔화되는 디스인플레이션(disinflation)을 경험했다.
1980년대엔 글로벌 소비자 물가상승률이 5%대로 크게 낮아진 데 이어 1990년대 전반엔 3%,후반 이후엔 2% 안팎으로 꺾였다.
개발도상국 물가상승률은 1970년대 20%에서 1980년대와 1990년대 전반에 40% 이상으로 높아졌으나 1990년대 후반 9%대로 하락한 뒤 2001년 이후엔 5%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글로벌화가 진전되면서 세계의 공장인 중국이 값싼 물품을 전 세계에 공급하고 국내외 기업 간 경쟁이 격화돼 제품 가격이 전반적으로 안정된 데다 1990년대 정보기술(IT) 발달 등 생산성 향상으로 경제의 공급 능력이 확대됐기 때문이다.
물가 안정을 최우선 정책과제로 설정하고 인플레이션과 전쟁을 벌여온 각국 중앙은행의 노력도 한몫 했다.하지만 최근 개도국들의 임금이 크게 오르면서 저물가 속 고성장 시대는 저무는 추세다.
유병연 기자 yooby@hankyung.com
경제학자이자 사회철학자인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의 얘기다.실제로 인플레이션은 화폐의 등장 이래 세계 도처에서 기승을 부렸다.
인플레이션의 자취는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그리스 정복자인 알렉산더 대왕 사후에 마케도니아가 분열되면서 물가가 뛰고 그리스 은화인 드라크마의 구매력이 곤두박칠쳐 민생이 피폐했다는 기록이 있다.한국 근대사에도 19세기 말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재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당백전을 대규모로 찍어내면서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한 사례가 있다.
1차 세계대전 후 독일에서 발생한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은 '하이퍼 인플레이션'의 공포를 각인시킨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독일이 1차 대전에서 패하자 연합국은 독일에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했다.배상금을 갚느라 재정적자가 확대된 독일 정부는 화폐 발행을 늘려 재정적자를 메웠다.
이로 인해 통화량이 팽창하면서 물가는 뛰고 마르크화는 휴지조각이 됐다.
1922년 5월 1마르크였던 신문 한 부 가격은 1년여 후인 1923년 9월 1000마르크로 1000배나 뛰었다.이어 신문값이 100만마르크로 다시 1000배가 뛰는 데엔 한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당시 화폐 가치가 곤두박질치면서 액면가 100조마르크 지폐가 발행됐을 정도다.
또 2차 대전 직후인 1946년 헝가리에선 무려 4200조%에 달하는 사상 최악의 슈퍼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당시 물가는 15시간마다 두 배로 뛰었다.
근래에 들어서도 △1985년 볼리비아 △1989년 아르헨티나 △1992년 러시아 △1993년 브라질에서 연간 1500~2만5000%에 이르는 인플레이션 사태를 경험했다.
이 같은 슈퍼 인플레이션은 경제뿐 아니라 심각한 정치·사회적 폐해를 몰고 온다.
1차 대전 이후 러시아와 독일에서 발생한 하이퍼 인플레이션은 러시아에선 공산주의가,독일에선 나치즘이 등장하는 계기가 됐다.
중국에서도 장제스의 국민당이 지배하던 1947~49년 발생한 물가 폭등은 중국 공산당이 권력을 잡는 기회로 활용됐다.
브라질도 1954년 물가상승률이 연 100%에 달했을 때 군사정권이 등장했다.
1976년 아르헨티나의 이사벨 페론 정권이 군부에 의해 전복된 것도 극심한 인플레이션 때문이었다.
시장자유주의 경제학의 대부인 밀턴 프리드먼은 "인플레이션은 경제의 치명적인 질병"이라며 "제때에 치유하지 못하면 사회 전체를 붕괴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1970년대 두 차례의 오일쇼크는 '비용 인플레이션(cost-push inflation)'의 전형을 보여줬다.
비용 인플레이션이란 수요가 많아서가 아니라 생산비용 상승으로 물가가 오르는 현상을 말한다.
1973년 아랍과 이스라엘 간 전쟁으로 촉발된 '1차 오일쇼크' 당시 배럴당 3달러였던 유가는 10달러를 뚫고 12달러까지 단숨에 네 배로 치솟았다.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이 불러온 '2차 오일쇼크'는 유가를 24달러로 두 배 올렸다.
두 차례에 걸친 석유파동으로 세계 경제는 연평균 9%의 물가상승률을 겪었다.
1990년대 이후 세계 경제는 물가상승세가 둔화되는 디스인플레이션(disinflation)을 경험했다.
1980년대엔 글로벌 소비자 물가상승률이 5%대로 크게 낮아진 데 이어 1990년대 전반엔 3%,후반 이후엔 2% 안팎으로 꺾였다.
개발도상국 물가상승률은 1970년대 20%에서 1980년대와 1990년대 전반에 40% 이상으로 높아졌으나 1990년대 후반 9%대로 하락한 뒤 2001년 이후엔 5%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글로벌화가 진전되면서 세계의 공장인 중국이 값싼 물품을 전 세계에 공급하고 국내외 기업 간 경쟁이 격화돼 제품 가격이 전반적으로 안정된 데다 1990년대 정보기술(IT) 발달 등 생산성 향상으로 경제의 공급 능력이 확대됐기 때문이다.
물가 안정을 최우선 정책과제로 설정하고 인플레이션과 전쟁을 벌여온 각국 중앙은행의 노력도 한몫 했다.하지만 최근 개도국들의 임금이 크게 오르면서 저물가 속 고성장 시대는 저무는 추세다.
유병연 기자 yoob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