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代를 잇는 家嶪] (11) 이화산업사…최훈 대표의 경영전략

"국군장병에게 위문편지 쓸 때만 되면 항상 마음이 벅찼어요.

친구들이 쓰는 편지지와 편지봉투가 모두 우리 것이었거든요.체육대회가 열리면 아버지가 상품으로 노트와 연습장 등을 트럭에 가득 실어다 줘 인기가 하늘을 찌를 정도였죠."

최훈 이화산업사 대표는 어린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친구 열에 예닐곱은 이화편지지와 이화원고지에 글을 쓰고,이화봉투로 위문편지를 부쳤다.그는 유명 업체의 사장이 아버지라는 사실이 내심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봉투회사를 경영하겠다는 마음을 먹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

좁은 공장에서 직원들과 함께 기계를 수리하느라 늘 '기름밥'에 절어있던 아버지의 모습은 상상하기 싫은 미래였던 까닭이다.최 대표의 꿈은 음악가였다.

중학교 때 시작한 클래식 기타연주가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서자 인근 여러 고등학교에서 그룹사운드 기타리스트로 영입 경쟁을 벌였을 정도다.

하지만 꿈꾸던 음악대학 진학은 포기해야 했다.아끼던 기타 2대를 아버지가 부숴버렸고 이후 깨끗이 마음을 접었다.

대학에서 무역학을 전공한 뒤 미국에 유학,미시간주립대에서 MBA를 마쳤다.

현지 레이저 장비업체에 취직해 슈퍼바이저로 2년 남짓 일을 배우자 딴 생각이 머리에 들었다.

"언어보다 힘든 것이 현지 문화였는데,이게 익숙해지니까 욕심이 생겼어요.

이곳에서의 경험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든 거죠."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부친의 설득에 결국 넘어간 것은 휴가 때 잠깐 귀국해서 회사를 둘러본 뒤였다.

"한마디로 문제 투성이었어요.

매출은 줄었는 데도 생산효율은 개선되지 않았고,좀 더 일찍 올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배운 걸 그대로 써먹을 기회였죠."

2004년 5월 미국 직장을 그만두고 돌아와 과장으로 경영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이 두 곳으로 쪼개져 있는 생산공장의 통합이었다.

이를 통해 중복 자재매입이 사라지고 물류비를 낮춰 전체 관리비가 20% 이상 절감됐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스트레스에 시달린다고 토로한다.

10년 뒤 먹거리를 찾아내야 하는데 딱 떨어지는 해답을 찾지 못해서다.

"아침에 일어 나면 침대에 까맣게 머리가 빠져있는 날이 많아지고 있어요.

아버지가 늘 위궤양을 달고 사셨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절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봉투 만드는 일을 끝까지 지켜나갈 작정이다.

중장기적으로는 문구가 아닌 신사업 부문 진출도 검토하고 있다.

"기자들도 볼펜과 취재수첩을 계속 쓰잖아요.아무리 첨단시대라 해도 봉투 영수증 계산서 등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우선은 생산성을 높이고 원가를 낮추는 일,비효율적인 자재구매 관행 등을 개혁하는 데 집중할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