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여록] 공기업CEO 불신임 그후

지난주 정부로부터 불신임 결정을 통보받은 우리은행 박해춘 행장은 당분간 사표 제출을 미루기로 했다.

내주 중 캄보디아를 방문해 예정대로 훈센 총리를 예방, 현지법인 설립을 위한 업무협조를 요청할 예정이다.영업 인ㆍ허가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물러난다는 이유만으로 은행에 중요한 비즈니스 일정을 취소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박병원 우리금융지주 회장도 정부의 교체 방침이 흘러나오는 가운데도 스페인에서 이달 초 열렸던 ADB(아시아개발은행) 총회에 참석,국제금융연합회(IIF) 이사 자격으로 세미나를 스폰서했다.

물러날 때 물러나더라도 신용이 생명이 금융회사의 대외 신인도를 염두에 둔 결정이었다.박해춘 행장의 사표 제출을 만류한 것도 박 회장이었다.

우리은행은 당초 박 행장의 사표를 즉각 수리하고 후임 인선 전까지 부행장 대행 체제로 움직일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우리금융 고위 관계자는 "정부의 교체 방침이 경질과 문책이 아닌 만큼 현 경영진의 명예로운 퇴진을 위한 배려가 아쉽다"고 말했다.더구나 공모 절차를 최대한 빨리 마무리짓겠다는 정부 방침에도 불구하고 현 경영진은 앞으로 두 달간은 현직을 유지한다.

뉴욕 증시에 상장된 회사여서 경영진을 교체하려면 이사회를 소집하고 주주명부를 폐쇄한 뒤 주총을 열어야 한다.

게다가 우리은행은 자산 규모가 300조원이 넘고 인력만 1만5000여명에 이르는 세계 60위권의 금융회사다.지주회사인 우리금융의 외국인 지분은 12%로 정부 지분 73%를 제외하면 유통 주식물량의 절반에 육박한다.

정부는 그런데도 우리금융의 최고경영자(CEO)는 경영 실적과 무관하게 언제든지 교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한 시중은행 부행장은 "박 회장의 사퇴 결정으로 전 세계 금융지도자들의 사교모임인 IIF에서 25년 만에 가져온 이사 자격은 앞으로 한동안 한국에 배정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아쉬워했다.우리은행 관계자는 "기업가치를 높여 공적자금 회수율을 높이려 한다면 은행의 대외 신인도 관리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 것 아니냐"며 "정부의 조용하고 세련된 일처리가 아쉽다"고 답답해했다.

이심기 경제부 기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