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보지 못하는 것

한해원 < 프로바둑기사·방송인 myung0710@naver.com >

"엄마,5월이 원래 이렇게 푸르러?" 고등학교 1학년생 딸의 생뚱한 질문에 엄마는 장난스러우면서도 묘한 미소를 보였다.비 오는 5월의 어느 일요일,지하철을 탔다.교복을 입은 여학생 여섯 명이 긴 의자에 쪼로록 앉아 연신 까르르 웃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이 소녀들은 어째서 쉬는 날 모두 교복을 입고 있을까.

어딜 다녀오는 걸까.

아님,가는 길인가.소녀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나의 중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지금도 여러 가지 직업을 갖고 있어 시간이 여유롭진 않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바쁘게 보냈고 시간 활용을 잘한 시기는 중학생 때였다.

다른 사람들이 고등학교 때 치르는 입시를 중학교 때 치른 셈이다.당시 나는 아침 7시에 일어나서 학교에 가고,오후 4시 반쯤이면 어김없이 바둑 도장으로 향했다.도장에서 바둑 두고 복기하고 기보를 보면서 세 시간가량 공부하다 집에 돌아오면 밤 11시.11시 반부터 학교 숙제하고 읽고 싶은 책 읽고,바둑 공부까지 하다 보면 새벽 3시가 됐다.

집에 돌아와서도 쉬기보다는 오히려 제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방학 때는 바둑 공부에 집중했다.학교 성적을 상위권으로 유지한다는 조건 아래 바둑을 하고 있었지만 학교 공부를 따로 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학교수업 내용을 현장에서 최대한 기억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렇게 다른 생각 할 틈이 없이 공부했지만,당시에는 책 읽는 것과 바둑만큼 재미있는 것이 없었다.의식주가 해결된다면 하루 종일 책 읽고 바둑만 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였을까.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1998년 4월 말,입단 대회에서 전승으로 1등을 차지하며 프로 기사가 됐다.바둑을 배운 지 만 6년 반 만의 일이다.그 해 5월,봄비가 촉촉히 내리던 어느 날 학교 가는 버스 창 밖으로 가로수를 바라보다가 문득 느꼈다.아,5월이 이렇게 푸르고 아름다웠던가! 친구들에게 물어보자니 웃음 거리가 될 것 같아 가장 친한 친구이자 스승인 어머니께 물어보기로 했다.5월이 원래 이렇게 싱그러웠느냐고.

그렇다.마음에 다른 것이 들어올 틈이 없으면 그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즐거워서 뭔가에 집중하고 있었지만,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원동력이었지만 세상에는 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아름답고 재미난 것들이 무척 많다.내 안의 소리에 귀기울이되 항상 주위를 둘러보는 긴 호흡과 여유를 갖고 싶다.그러면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