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르포] 기름유출 악몽서 깨어나는 태안반도를 가다

"꽃게 풍년에 요샌 좀 웃습니다"
"띠이이이∼,(손가락 네 개를 들어보이며) 2만1000,162 100."

충남 태안반도 한 쪽 끝 서산수협 안흥지소.바다에서 갓 잡아올린 수산물을 거래하는 경매사들의 입과 손이 바쁘다.수협에 마련된 임시 수조는 어린아이 만한 자연산 광어,배를 빵빵하게 부풀린 복어,보기에도 활기찬 놀래기들로 가득 찼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산더미처럼 쌓인 씨알 굵은 꽃게를 삽으로 상자에 퍼담아 쉴 새 없이 수조로 옮기는 광경이다.

상자에 담긴 꽃게들은 계속 상자 밖으로 기어나오고 어부는 다시 쓸어담기에 여념이 없다.꽃게철을 맞아 23일 다시 찾은 태안은 지난해 말 기름 유출 사고의 참극을 딛고 지역 생태계도,지역 경제도 조금씩 되살아 나고 있었다.

"오늘은 좀 적게 들어온 편"이라는 어부의 말에는 꽃게의 활기찬 발버둥처럼 생기가 물씬 묻어났다.

◆돌아온 꽃게,지역 경제도 새싹 움튼다요즘 태안지역 경제의 숨통을 틔우고 있는 것은 단연 꽃게다.

태안반도 안흥지역에서만 하루 14∼15t의 꽃게가 잡히고 있다.

수온 상승 덕분에 지난해보다 수확량이 5배가량 늘었다.안흥항에서만 이 지역 선박의 70%가량인 45∼50척의 어선이 꽃게잡이에 나서고 있다.

물론 꽃게 어장은 기름 피해 지역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놀래기 같은 다른 고기를 잡는 연안 어선들도 일주일 전부터 다시 출항을 시작했다.

수협 근처에는 '꽃게 박스로 포장 판매합니다'라는 현수막이 붙어 있고 도매상 상인들의 표정은 활기차다.

지역민과 횟집 주인들이 수산물을 사기 위해 줄을 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김부국 서산수협 경매사는 "기름 사고로 어획량이 예전의 10분의 1 수준으로 줄었었는데 요즘 들어 꽃게로 거래가 다시 회복되고 있다"며 "꽃게 가격은 ㎏당 2만∼3만1000원 선으로 지난해(3만5000원)에 비해 싸지만 물량이 늘어 어민 소득은 많이 회복됐다"고 전했다.

실제 서산수협 안흥지소를 통한 수산물 위탁 거래액은 1월 12억7000만원,2월 15억2000만원 선으로 지지부진했지만 3월 24억4000만원,4월 37억8000만원으로 크게 늘었다.

이달 들어서도 지난 15일까지 27억원가량의 판매액을 기록했다.

◆신두리 펜션에도 봄바람 솔솔

기름 유출의 직격탄을 맞은 신두리 펜션 업체들도 주말 수요 회복으로 서서히 살아나고 있다.

"복층에 화장실 2개인 방은 다 나갔는데요." 신두리 최대 팬션 업체인 '하늘과 바다사이 리조트' 예약실에는 직원 5명이 문의 전화를 받느라 바쁘다.

지난 2월 취재진이 찾았을 때와는 딴판이다.

당시에는 직원 대부분이 해고됐고 안내 직원 1명만 쓸쓸히 예약실을 지켰다.

이 회사 이홍렬 사장은 "주말이나 연휴엔 기름 사고 전의 40∼50% 수준으로 손님들이 회복돼 직원도 새로 고용할 생각"이라며 "개인ㆍ가족여행 손님이 늘고 있고 단체손님까지 가세하면 6월 이후엔 숨통이 트일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인근 신두리횟집 종업원도 "평일에는 문을 닫고 있지만 주말에는 손님이 꽤 많다"며 "지난해 절반 수준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이날 신두리 사구 주변에는 이화여고동창생(70년 졸업) 34명 등 관광버스를 대절한 단체 관광객 모습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신두리 지역에서 낚시ㆍ레저사업을 하는 최종석씨는 "이달 들어 낚시 손님을 처음 받았다"면서 "아직 예전의 10% 정도 수준이지만 6월 말 이후에는 레저ㆍ캠프 사업도 본격 재개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대출상환 유예기간 끝나가

그렇지만 태안지역의 그늘이 완전히 걷힌 것은 아니다.

국제유류기금의 배상을 받기로 결정된 피해 주민조차 아직 피해액 산정 중이고 배상 결정이 이뤄지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다.

따라서 여름 '한철장사'인 관광ㆍ레저업 비중이 높은 태안 경제의 회복 여부는 올 여름이 고비가 될 것으로 보인다.

태안지역 펜션업자들을 비롯한 지역 주민들의 금융 부채 문제도 '시한폭탄' 성격이 짙다.

특히 농협 등 주요 금융회사들이 대출 원금과 이자 상환을 유예해줬지만 하반기엔 유예 기간이 대거 만료된다.

피해 주민에 대한 대출금리 인하 효과도 미미한 수준이고 정부의 각종 지원책도 여전히 부족한 편이다.주민 대부분이 안정적인 수입원을 찾지 못하는 한 지금의 일부 긍정적인 신호들이 '반짝'효과에 불과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태안=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