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avo! My life] 박진선 샘표식품 사장 "음악이 흐를때 행복도 흘러"

지난 29일 밤 서울 압구정동 올드 팝 전문 카페 '트래픽'.1970년대 히트곡 존 바에즈의 '다이아몬드 앤드 러스트'가 흘러나오자 박진선 샘표식품 사장(58)은 자기 삶의 일부인 음악에 대한 얘기를 자연스럽게 꺼냈다.

"음악을 들으면 행복해집니다.마치 어린 시절,원하던 사탕을 먹는 기분이랄까.특히 연주를 잘한 음악을 들을 때면 말할 수 없이 즐겁습니다."

그는 소위 '음악 마니아'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클래식 광(狂)'이다.이따금 카페에 들러 술잔을 기울이며 올드 팝을 즐기지만 훨씬 자주 집이나 공연장에서 클래식에 빠진다.

서초동 자택에는 1000여장의 클래식 LP와 수백 장의 CD가 갖춰져 있다.

그는 지금도 음악을 들으면 그대로 악보에 옮길 수 있다.수십 년간 음악 사랑에서 자신만의 시각도 갖게 됐다.

음악과의 인연은 아홉살(초등학교 2학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승복 샘표식품 회장의 장남으로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그는 모친의 권유로 중학 졸업 때까지 피아노를 배웠다.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한 필수 코스인 바이엘과 체르니 등 피아노 교본을 셀 수 없이 반복했다.

말이 권유지 사실상 강요였다.

재미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는 경기고에 진학하면서 피아노 배우기를 중단했다.

그러나 1960년대 말 서울대 공대 재학시절,대학 내 4인조 록밴드 '레이니 포(Rainy Four)'에 베이스 주자로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각종 발표회와 대학 축제 등에 나가 청중 앞에서 연주했다.

한 방송사가 주최하는 경연대회에서 예선을 통과하기도 했다.

당시 그가 즐긴 음악은 록과 팝이었다.

클래식과의 인연은 1977년 미국 스탠퍼드 대학원 시절,고계원씨(현 아주대 수학과 교수)와 결혼하면서부터다.

클래식을 좋아하는 부인에게 맞추기 위해 우선 오디오 기기를 샀다.

스피커는 영국제 '스펜더'로 비교적 괜찮은 제품이었지만 앰프는 중저가품인 '그레이트 아메리칸 사운드'(두 제품은 여전히 그의 애장 품목이다)였다.

하루 3시간씩 1년간 집중적으로 클래식을 들었다.

첫 두세 달 동안에는 토할 듯싶었다.

"오케스트라를 들을 때 처음에는 멜로디가 들리지만 나중에는 악기소리가 한꺼번에 다 들리더군요.

오케스트라를 듣는 게 점점 힘들어졌어요.그래서 악기를 줄인 곡들로 넘어갔죠.현악 4중주곡,3중주곡,소나타,성악으로 이동하는 식이었지요."

사실 당시에는 클래식이 '공부'에 가까웠다.

클래식을 듣는 쾌감은 시간이 훨씬 더 흐른 뒤에 찾아왔다.

"클래식을 10년쯤 듣고 나니 장르를 초월해 모든 음악이 좋아지더군요.20년쯤 지난 후엔 음악을 들을 때 행복해지더라고요."

그가 좋아하는 노래와 곡들은 다양하다.

팝으로는 존 바에즈,사이먼 앤드 가펑클 등 외국 가수뿐 아니라 트윈폴리오(송창식ㆍ윤형주 듀엣),이장희 등 국내 가수들의 노래도 좋아한다.

클래식으로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베토벤과 바르톡의 '현악 사중주곡' 등을 꼽는다.

윤이상의 현대 음악도 빼놓을 수 없다.

"사실 클래식과 팝에는 차이가 있어요.클래식은 작곡가가 온 에너지를 쏟아부어 짜임새 있게 만들기 때문에 생각과 감정도 그만큼 풍부합니다.팝송의 에너지는 그에 미치지 못하지요."

그는 클래식을 한 수 위로 치지만 음악 감상에선 장르를 초월해 거의 모든 음악을 즐긴다.

"곡의 제목이 무엇이며 누가 작곡했고,가수가 누구이며 등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음악이란 기억력 테스트가 아니라 즐기는 것이니까요."

낡은 앰프(그레이트 아메리칸 사운드)를 바꾸지 않는 이유도 음악의 본질에 충실하기 위해서다.

앰프를 자주 바꾸는 것은 음악이 아니라 소리를 듣는 행위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음악을 제대로 즐기려면 콘서트에 가는 게 최고지요.미국 유학 시절,아내와 함께 콘서트에 자주 갔습니다.

학생 신분이니 싼 티켓을 구입한 뒤 입장해 앞줄 빈자리를 찾아다니는 식이었지요.빈자리로 옮겼다가 좌석 주인이 오면 되돌아온 경험도 많습니다."

흑인 소프라노 제시 노먼 공연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고 했다.

공연장 가운뎃줄 빈자리에 앉았는데 멀리서 좌석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같은 열 좌석 양쪽에 손님들이 꽉 차 나갈 수 없었다.

그는 아내와 급히 일어나 앞좌석으로 넘어갔다.

"좌석 티켓을 놓고 지금도 집사람과 티격태격합니다.저는 R석을 원하는데 아내는 늘 싼 좌석을 고집하니까요."

휴일이면 FM라디오 클래식 채널에 주파수를 맞춰놓곤 한다.

차를 타고 가다가도 뛰어난 연주곡이 흘러나오면 내리지 않고 끝까지 듣는다.

"라디오로도 연주의 수준이 느껴지거든요.장한나도 라디오에서 처음 듣고 뛰어난 기량을 알아봤어요.요즘도 장한나의 공연에는 꼭 갑니다."

그는 최근 사모펀드 마르스1호와의 경영권 분쟁으로 겪은 마음고생도 털어놨다.

"펀드의 공격으로 사실 상당히 고통스러웠습니다.펀드 측은 만사가 돈으로 해결된다고 믿는 사람들이에요.그렇지만 수십 년간 관계를 맺어온 우호세력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줬어요.그분들과의 신의를 위해서라도 정도 경영을 지속해 나가겠습니다."

글=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
사진=양윤모 기자 yoonm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