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용기가 필요한 정부

우리 사회 중산층의 삶이 예전보다 고달파진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주택담보대출 이자를 내기가 부담스럽다고,해외에서 공부하는 애들 뒷바라지 하기가 너무 힘들다고,펀드를 해약해야 할지 고민 중이라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경제기자니까 귀동냥할 만한 얘기라도 해주지 않겠느냐고 기대하는 표정에 당혹감을 느낀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고통은 너무 좋은 시절을 향유했기 때문에 생긴 상실감이라고,누구나 1억원 2억원을 쉽게 빌려 집을 살 수 있을 정도로 금리가 낮았다고,평범한 월급쟁이들마저 자녀를 조기유학 보낼 만큼 호사를 떨어왔다고 말하기도 난감하다. 달콤한 과거의 추억을 깨뜨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영국은 과거의 영화(榮華)에 빠져 끝까지 버티다가 국가부도로 갔던 경험이 있다. 1973년 1차 석유파동이 터지자 영국의 경제성장률은 1974년 -1.1%,75년 -0.7%로 꼬꾸라졌고 물가는 16%,24.2% 치솟았다. 하지만 당시 영국인들은 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노조는 해고를 거부했고 20~40%의 임금인상을 밀어붙였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챙긴다는 복지국가를 만들어낸 노동당 정부는 예산을 계속 퍼부어댔다. 수입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파운드화 가치도 인위적으로 높게 유지했다. 그 결과 경제는 망가졌고 영국은 1976년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해야 했다.

국민에게 고통을 감내해줄 것을 호소했던 미국은 1980년대 초 엄청난 고통을 겪었지만 결국 위기를 극복했다. 폴 볼커 미 연방제도준비이사회(FRB) 의장은 2차 석유파동이 터지자 정책금리를 연 20%까지 끌어올리는 결단을 했다. 실업률이 두 자릿수로 치솟고 수많은 기업들과 저축대부조합(S&L)들이 파산했다. 하지만 미국은 피를 흘린 대가로 물가가 4%로 낮아졌다. 살아남은 기업들은 세계적인 경쟁력을 되찾았다.

우리 역시 고통을 감내하면서 위기를 극복했던 경험이 있다. 1970년대 1차 석유파동이 닥쳤는데도 박정희 정부는 수출 증대와 중공업 투자를 고집스럽게 밀어붙였다. 그 대가는 20%가 넘는 고물가였다. 1980년대 초 신군부 시절에는 반대로 물가를 확실하게 잡겠다고 나섰다. 국민은 마이너스 성장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어려웠던 시절 쓴 약을 먹은 우리는 이후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이뤄낼 수 있었다. 그때에 비해 지금 경기 상황은 그래도 괜찮은 편이지만 저금리와 부동산 가격 급등,오르는 주가와 높은 원화가치를 토대로 쌓아올린 삶의 수준을 더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됐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졌다. 물가를 안정시키거나,아니면 경기를 살리거나 하는 선택적 상황을 맞았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여ㆍ야 정치권은 물론 정부와 한국은행조차 달콤한 말만 쏟아내고 있다. 금리를 올리면 물가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속삭일 뿐 '여러분의 일자리가 없어지는 고통이 생길 수 있다'고 용기있게 호소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것이 촛불집회의 후유증이라면 정부는 하루빨리 털어내고 국민에게 고통 감내를 호소할 수 있는 용기와 과단성을 되찾아야 한다.

현승윤 경제부 차장 hyuns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