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 교단 떠나는 '섬진강 시인' 김용택씨 "선생님요? 이웃집 할아버지였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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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어른과 동등한 인격체로 대해 주세요. 서로 대등할 때 사랑이 건강해집니다. "
올해 환갑을 맞는 김용택 시인(사진)이 이달 말 38년간의 교단 생활을 접는다. '섬진강 시인'이자 '산골학교 선생님'으로 잘 알려진 김씨는 "나이가 들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노쇠해 더 이상 아이들 앞에서 활달하지 못할 것 같아 정년은 아니지만 교단을 떠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모교인 전라북도 임실 덕치초등학교에서만 30년 가까이 근무하다 보니 나는 선생이라기보다 친한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존재였다"면서 "예전에 머리를 빡빡 깎은 적이 있었는데,유치원 아이들은 '저기 빡빡이 선생 간다'고 소리치고 제자들은 몰려와서 머리를 만져보더라"며 크게 웃었다. 김씨가 처음부터 아이들과 격의 없이 지냈던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농장을 운영하다 실패한 다음 서울로 잠시 '도피'했다가 고향에 돌아온 그는 친구들 때문에 '우연히' 교직에 몸담게 됐다. "친구들이 초등학교 교사를 권하기에 생각도 안 해봤고 준비도 안 했던 터라 싫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사진만 찍어달라고 하더군요. 한 친구가 초등교원양성소 원서 접수까지 하고 수험표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그렇게 준비 없이 교사가 됐으니 무슨 신념이 있었겠습니까. "
이렇던 그를 변하게 한 계기가 된 것은 독서였다. "교사생활을 하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책을 통해서 나를 알게 되고 인생을 알게 되면서,이렇게 방만한 자세로 교사를 한다는 게 죄악으로 느껴졌습니다. 교단에 선 지 5년 정도 됐을까요. 교실에 들어서는데 아이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인사를 하더군요. 사실 그전까지는 50~60명 아이들을 1명으로 보고 가르쳤는데,그 순간 처음으로 아이들 하나하나가 독립된 인격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이들이 물결에 떨어져 반짝반짝 빛나는 달빛처럼 보였습니다. "
김씨는 교사지망생에 대한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요즘은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교대나 사대에 진학한 다음 치열하게 임용고시 준비를 합니다. 그 결과 교육자로서 가치관도 양심도 갖추지 않은 '싸늘한 직업인'으로 교단에 서는 것 같아요. 교사는 장사꾼이나 직업인이 아니라,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자신도 배우는 전인적인 존재가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그는 또 "초등학교에서만이라도 아이들을 점수로 줄을 세우지 말아야 한다"며 "경쟁에 시달린 아이들이 사람,나무,흙,풀,물 등 생명체와 노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다른 사람을 누르고 올라서는 법부터 알게 되는 건 끔찍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1982년 시 <섬진강>으로 등단한 김씨는 아이들과 부대끼며 얻은 깨달음을 토대로 한 작품을 여럿 발표했다. 그는 "아이들은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고,시인은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해석한다는 점에서 통하는 게 있다"면서 "항상 세상을 신기하게 보는 아이들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생각이 솟아나고 이를 정리하면 글이 된다"고 말했다.
김씨는 교사로서는 마지막으로 동시집 ≪너 내가 그럴 줄 알았어≫(창비)를 펴내는 등 차근차근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은퇴 후에는 고향에 머무르며 어린이들을 위한 글을 쓰면서,환경문제를 공부하고 고전 독해를 위한 한문공부도 할 계획이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
올해 환갑을 맞는 김용택 시인(사진)이 이달 말 38년간의 교단 생활을 접는다. '섬진강 시인'이자 '산골학교 선생님'으로 잘 알려진 김씨는 "나이가 들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노쇠해 더 이상 아이들 앞에서 활달하지 못할 것 같아 정년은 아니지만 교단을 떠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모교인 전라북도 임실 덕치초등학교에서만 30년 가까이 근무하다 보니 나는 선생이라기보다 친한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존재였다"면서 "예전에 머리를 빡빡 깎은 적이 있었는데,유치원 아이들은 '저기 빡빡이 선생 간다'고 소리치고 제자들은 몰려와서 머리를 만져보더라"며 크게 웃었다. 김씨가 처음부터 아이들과 격의 없이 지냈던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농장을 운영하다 실패한 다음 서울로 잠시 '도피'했다가 고향에 돌아온 그는 친구들 때문에 '우연히' 교직에 몸담게 됐다. "친구들이 초등학교 교사를 권하기에 생각도 안 해봤고 준비도 안 했던 터라 싫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사진만 찍어달라고 하더군요. 한 친구가 초등교원양성소 원서 접수까지 하고 수험표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그렇게 준비 없이 교사가 됐으니 무슨 신념이 있었겠습니까. "
이렇던 그를 변하게 한 계기가 된 것은 독서였다. "교사생활을 하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책을 통해서 나를 알게 되고 인생을 알게 되면서,이렇게 방만한 자세로 교사를 한다는 게 죄악으로 느껴졌습니다. 교단에 선 지 5년 정도 됐을까요. 교실에 들어서는데 아이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인사를 하더군요. 사실 그전까지는 50~60명 아이들을 1명으로 보고 가르쳤는데,그 순간 처음으로 아이들 하나하나가 독립된 인격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이들이 물결에 떨어져 반짝반짝 빛나는 달빛처럼 보였습니다. "
김씨는 교사지망생에 대한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요즘은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교대나 사대에 진학한 다음 치열하게 임용고시 준비를 합니다. 그 결과 교육자로서 가치관도 양심도 갖추지 않은 '싸늘한 직업인'으로 교단에 서는 것 같아요. 교사는 장사꾼이나 직업인이 아니라,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자신도 배우는 전인적인 존재가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그는 또 "초등학교에서만이라도 아이들을 점수로 줄을 세우지 말아야 한다"며 "경쟁에 시달린 아이들이 사람,나무,흙,풀,물 등 생명체와 노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다른 사람을 누르고 올라서는 법부터 알게 되는 건 끔찍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1982년 시 <섬진강>으로 등단한 김씨는 아이들과 부대끼며 얻은 깨달음을 토대로 한 작품을 여럿 발표했다. 그는 "아이들은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고,시인은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해석한다는 점에서 통하는 게 있다"면서 "항상 세상을 신기하게 보는 아이들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생각이 솟아나고 이를 정리하면 글이 된다"고 말했다.
김씨는 교사로서는 마지막으로 동시집 ≪너 내가 그럴 줄 알았어≫(창비)를 펴내는 등 차근차근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은퇴 후에는 고향에 머무르며 어린이들을 위한 글을 쓰면서,환경문제를 공부하고 고전 독해를 위한 한문공부도 할 계획이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