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거꾸로 하지 말자

김진수 <CJ제일제당 사장 jinsoo@cj.net>

약속시간에 늦을 듯해 가는 도중에 기다리는 사람에게 전화할 경우가 있다. 보통은 이렇게 말한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지금 거의 다 왔습니다. 곧 가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그 순간을 모면하려고 거꾸로 말하는 화법이다. 곧 도착할 줄 알고 초조하게 기다리는 상대에게 실망감을 주고,결국 말의 신뢰를 잃게 되는 경우가 많다. 보다 좋은 화법은 지금 가고 있는 곳이나 앞으로 걸릴 시간을 말할 때 약간 더 보수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상대방은 그 즉시에는 화를 낼 수도 있지만,심리적으로 더 오래 기다릴 각오를 하게 마련이다. 그래야 말의 신뢰가 생긴다.

조직에서도 거꾸로 해서 손해를 보는 경우가 있다. 상사에게 보고할 때,일하는 과정에서 생긴 이런저런 성취를 갖고 자랑 삼아 보고하는 경우가 있다. 분명 상사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이지만 그 조직은 틀림없이 곧 위험에 빠질 것이다.

상사에게 보고할 때가 조직에는 참으로 귀한 시간이다. 그런데 상사가 반가워할 내용만 주로 이야기한다면 그 시간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허비되는 셈이다. 상사에게 어려운 난관을 토로하고 물어보고 함께 머리를 짜내야 귀한 시간의 값어치가 더욱 높아진다. 상사의 입장에서도 부하직원이 가져오는 골치 아픈 문제를 거침없이 해결해나갈 때 상사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사가 거꾸로 하는 경우도 있다. 승진철에 승진한 부하직원에게 기쁜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하고 탈락한 직원에게 무심할 때가 있다. 나쁜 소식을 전하는 것은 어렵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은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사가 가장 먼저 할 일은 탈락한 직원을 붙들고 승진이 안 된 이유를 설명해주고 코칭해주는 일이다. 그 부하직원이 정신적으로 가장 힘든 때이기 때문이다.

기업에서도 거꾸로 하는 경우가 있다. 제품 품질에 투자하기보다는 좋은 판촉물을 마련하는 데 주력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소비자나 제품 품질보다 판촉물을 크게 보는 것이다. 품질을 깎아내려서 마련한 돈으로 판촉물을 사서 소비자에게 권유한다면 단기적으로 반짝할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는 불 보듯 뻔한 이야기다.

순간의 달콤함이나 위기 모면보다는 당장은 씁쓸하더라도 본질가치를 선택해야 한다. 남에게 관대하고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라는 관인엄기(寬人嚴己)란 말도 거꾸로 하기 쉬운 인간의 속성을 경계하는 말이다. 잠깐 편하게 가려고 하면 거꾸로 하기 쉽다. 그러나 거꾸로 하면 절대 일등이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