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60년…도전의 순간들] (9) 1988년 서울 올림픽 ‥ "서울 꼬레아" 바덴바덴의 기적


'선더버드 작전을 극비리에 수행하라'

1981년 9월 서독의 자그마한 휴양도시 바덴바덴에서 '1988년 올림픽 개최지'를 선정하는 IOC총회가 열리기 열흘전.청와대 경호실장과 대한체육회장을 지냈던 박종규씨에게 이같은 특명이 내려졌다. 내용은 개최지로 거의 굳어진 일본의 나고야를 제치고 서울이 선정되도록 하라는 것.일본은 치밀한 준비와 함께 오랜 유치활동을 전개한 반면 한국은 유치활동을 거의 펼치지 않아 대세가 나고야로 거의 기운 상황이었다. 실낱같은 가능성을 살려내기 위해 '작전'이 진행됐다. 그리고 열흘 뒤인 9월30일 IOC총회에서는 "세울 피프티투(52),나고야 투엔티세븐(27)…세울 꼬레아!"가 발표되며 '선더버드 작전'이 마무리됐다. 보수적이고 전통을 중시하는 IOC위원들이 예상을 뒤집고 한국의 손을 들어주며 '바덴바덴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일본은 충격에 빠졌고 한국은 환호했다. 이는 지금도 올림픽 역사에서 '쿠테타'에 버금가는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 열흘 동안 어떤 일이 있었을까.

서울올림픽은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를 받으면서 첫 걸음을 떼였다. 그 해 10월8일 내외신기자에게 공식 발표를 했으나 불과 18일 뒤에 일어난 10·26사태가 발생,유치계획은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1980년8월27일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한 뒤 올림픽 유치 계획은 국가 대외 이미지 제고 차원에서 필요하다는 쪽과 경제적·재정적 여건을 감안할 때 부정적이라는 쪽이 맞섰다.

전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이 결심한 사항인데다 역사적인 사업을 추진하지도 않고 포기할 수 없다'며 유치쪽의 손을 들어줬다. 실무대책위원회가 소집되고 민간인을 중심으로 하는 올림픽유치위원회를 구성키로 하고 위원장에 정주영 전경련회장을 추대했다. 정 회장은 "정부가 올림픽을 유치하겠다는 입장만 확실히 한다면 개인돈으로라도 올림픽 유치활동비를 모두 대겠소"라고 말했다. 일본이 64년 동경올림픽을 통해 발전했듯이 한국도 올림픽을 계기로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판단 한 것.사업상으로도 중동 건설경기가 시들고 있는 상황에서 불황에 빠진 건설부분의 돌파구로 올림픽 개최가 절실했다.

하지만 대외적인 여건이 최악이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이 서방 자유진영 국가들의 불참으로 반신불수가 된 지 일년 남짓한 시점이라 남북이 분단된 한반도에서 올림픽을 개최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당시 김택수IOC위원은 "지금 상황에서 투표를 하면 서울 지지표는 나 1표 뿐"이라고 말했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특단의 대책으로 '선더버드 작전'이 단행됐다. 박종규씨는 IOC위원들 사이에 일본이 올림픽을 두차례 개최한다는 것에 거부감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IOC위원들 사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아디다스 홀스트 다슬러 회장과 물밑거래를 시도했다. 다슬러 회장은 한국이 미주 지역 TV 중계 협상권과 올림픽 후원기업 선정권을 자신에게 보장해 주면 44표 정도를 얻어주겠다고 제안했다. 재계 인사들도 득표활동에 발벗고 나섰다. 정주영 유치위원장은 서구 IOC위원 가운데 핵심인 바이츠 IOC위원을 접촉한데 이어 영국 귀족 출신의 위원인 액세터 후작을 한국편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다. 정 위원장은 후작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들이 되겠다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이건희 삼성그룹회장,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최원석 동아그룹 회장,조중훈 KAL사장 등 재계 인사들도 IOC위원들을 우리 편으로 만드는데 총력을 다했다. 유치위는 한 표가 아쉬워 병상에 있는 말레이시아 IOC위원을 급히 수소문해 공수하기까지 했다.

유치에 성공한 뒤에도 개최까지는 험난한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통성 시비가 끊이지 않던 군사정권이 정치적인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돌파구로 올림픽을 유치했다며 거센 비판을 받았다. 1984년 5월8일에는 소련이 LA올림픽 불참을 공식 발표하면서 큰 위기를 맞았다. 국제사회 일각에선 개최지 변경까지 거론됐다.

당시 노태우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은 1984년 5월18일 IOC본부가 있는 스위스 로잔으로 날아가 사마란치 IOC 위원장과 담판을 지었다. 노 위원장은 "88올림픽 개최지가 변경된다면 나는 그날을 IOC 장례일로 정해서 잠실 메인스타디움에 IOC 공동묘지를 만들고 대대로 IOC 위원들을 원망할 것이다"라고 폭탄선언까지 했다. 노 위원장 입장에서는 올림픽 개최지가 변경되면 자신의 정치 생명마저 끝날 수 있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정주영 회장도 IOC 위원들을 만나 다시 한 번 설득작업을 펼쳤다. 사마란치 위원장은 각국 선수들의 올림픽 참가를 보장하기 위해 올림픽 헌장을 개정해 불참국가를 제재키로 하는 규정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북한에서 남북 공동개최안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1987년 12월 헝가리와 동독이 서울올림픽 참가의사를 밝혔고 88년 1월 소련이 참가를 공식발표했다. 이런 험난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동서(東西)가 자리를 함께 한 서울올림픽이 열리게됐다.

서울올림픽에서 한국은 금메달 12개를 따면서 소련-동독-미국에 이어 세계 4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올림픽 개최로 인한 경제 효과는 총 26억달러에 달했고 직간접 고용효과도 33만6000명에 이른 것으로 평가됐다. 올림픽을 앞두고 집중적인 투자가 이뤄지면서 경제성장률이 연 10%를 넘는 고성장 시대를 열었다. 해외 관광객도 30만명이 다녀갈 정도로 '대박'을 터뜨렸다. 게다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온 국민이 갖게 된 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부수효과였다.

올림픽을 통해 얻은 자신감은 2002년 월드컵 개최로 이어졌다. 월드컵은 생산유발효과가 11조5000억원,고용창출 35만명,관광객 40만명 등 가시적인 성과외에도 국내 기업의 대외 이미지 향상과 관광산업활성화,수출 증대 등의 무형의 효과를 안겨줬다. 게다가 한국이 월드컵 4강에까지 오르면서 세계무대에서 한국의 위상은 한층 강화됐다.

한은구 기자 to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