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代를 잇는 家嶪] (24) 아동산업 ‥ 위기 때마다 브랜드 개발로 재도약

63년 국내에 첫 시계공장…수출도 1호


"회사가 50년 가까이 됐는데도 아동산업이라고 하면 어린이용 물건 만드는 곳으로 알아 고민이 적지 않았습니다. "시계회사인 아동산업의 김종수 대표(54)는 "한때 사명을 바꿀 것도 검토했지만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아시아에서 세계로 뻗어나가는 회사로 발전시키기 위해 사명을 계속 지켜나가겠다"며 이같이 말했다.

아동산업의 아동(亞東)이란 아시아의 동쪽이라는 뜻.국내 시계회사 중에서 최초로 해외에 시계를 내다 팔았으며 현재 패션시계 포체(FOCE)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회사는 현재 미국과 중국을 포함해 전 세계 19개국에 수출 중이며 연간 매출은 약 270억원.

아동산업의 창업주 김창규 회장(1993년 작고)은 1·4후퇴 때 남한으로 내려와 미군부대에 군속으로 근무했다. 이때 알게 된 홍콩 상인을 통해 손목시계 판매에 관심을 갖게 됐다. 평양공대 기계과 출신인 김 회장은 시계 장사가 돈이 될 것을 직감했다. 1953년 서울 회현동에서 10여명의 직원을 데리고 아동산업을 설립한 뒤 시계를 수입해 팔았다. 당시 국내 기술로는 시계를 만들 수 없었다. 김 대표는 "시계가 부의 상징으로 인식되던 시기라 없어서 못팔 정도였다고 전해들었다"고 말했다. 시계 판매로 돈을 벌자 아동산업은 가발제조업과 농수산물 유통업까지 사업을 확장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첫 위기를 맞는다. 정부가 외화유출 방지를 이유로 시계를 수입금지 품목으로 지정한 것.

이로 인해 시계 밀수시장이 커지는 것을 보고 김 회장은 국산시계를 직접 만들기로 결심한다. 인천시 부평에 3300㎡의 땅을 매입,1963년 시계공장을 세웠다. 국내 시계공장 1호였다. 태엽이나 시계바늘을 돌아가게 만드는 부속인 무브먼트는 스위스에서 수입하고 케이스나 줄 등 외장은 직접 만들어 조립했다.

회사는 달러를 벌 목적으로 수출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꾸준히 수출 문을 두드리던 끝에 1970년대 초 국내 최초로 시계를 수출하는 데 성공했다. 미국 파나마 멕시코 등에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시계를 인기리에 팔았다. 완제품을 만들어 줄 시간이 없어 줄 따로,몸체 따로 팔아도 바이어들이 다 사갈 정도였다. 하지만 1981년 남미에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수출이 완전히 중단되자 회사는 두 번째 위기를 맞았다. 김 대표는 "2년간 수출을 못했다"며 "OEM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1982년도부터 자체 브랜드 개발에 매달렸다"고 설명했다. 회사는 2년이 넘는 연구 끝에 1985년 웨스타(Westar)라는 브랜드를 개발했다. 이 브랜드는 특히 중동에서 인기가 높아 1990년대 초반까지 매년 2000만달러가 넘는 수출실적을 올렸다. 김 대표는 "장사가 잘된 것도 좋았지만 자체 브랜드로 중동 시장을 개척해 국산 시계에 대한 인식을 바꾼 것이 더 의미있던 일"이라고 강조했다.

김종수 대표는 홍익대학교에서 무역학을 전공했다. 1979년 대학 졸업 후 아버지의 권유로 입사했다. 학교에서 익힌 무역지식이 사업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김 대표는 입사 후 공장에서 시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 영업도 다니면서 바닥부터 일을 익혔다.

특히 김 대표는 국내 시장보다 해외를 개척해야 한다는 논리로 부친을 설득해 한국 최초의 시계 수출용 자체 브랜드 웨스타를 만든 주역.김 대표는 완성된 웨스타 샘플을 갖고 무작정 중동으로 날아갔다. 김 대표는 "당시만 해도 두바이 등에서는 한국 시계에 대한 인식이 아예 없는 상태여서 영업에 애를 먹었다"며 "시간 약속도 안 지키는 현지인들의 습성 탓에 며칠씩 무작정 기다리는 것은 예사였다"고 회상했다. 어려움을 겪던 김 대표에게 1984년 희소식이 날아왔다. 두바이의 대표적 시계수출입 업체인 AFW사에서 샘플을 보고 싶다고 연락해온 것.AFW는 웨스타 브랜드의 120개 모델 1800개를 샘플 형식으로 첫 주문을 했다. 김 대표는 "출장을 다니면서 숙소에 바이어를 초청해 직접 밥을 지어 대접하기까지 하면서 애쓴 것이 이 같은 성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1993년부터 회사는 또 한번의 위기를 맞았다. 중동에 진출한 국내 시계업체들 간 가격 낮추기 경쟁으로 채산성이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한 것.설상가상으로 시장상황을 고민하던 김 회장이 갑작스럽게 고혈압으로 쓰러져 3일 만에 유명을 달리하자 회사가 곧 망할 거라는 소문까지 돌기 시작했다. 김 대표는 회사 분위기를 추스르고 1994년부터 중동 현지에서 약 2년을 머물며 거래처를 정상화시키는 데 공을 들였다.

이로 인해 안정적인 내수시장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던 김 대표는 한국으로 돌아온 뒤 2년간 개발에 매달려 10대 후반부터 20대까지를 겨냥한 새로운 브랜드 '포체'를 내놓았다. 포체는 현재 연간 100억원의 매출을 올려주는 회사의 대표 브랜드.최근에는 포체 브랜드로 패션사업 진출도 모색하는 등 사업다각화를 꾀하고 있다. 김 대표는 "좀 더 좋은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임기훈 기자 shagg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