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위기관리 경영 실종

주력기업 수익 곤두박질에도 무대책
사장단협의회 컨트롤타워 역할 못해
리더십.성장동력.브랜드 '복합위기'
주력기업 수익 곤두박질에도 무대책

삼성의 전매특허인 위기관리 경영이 실종됐다. 외환위기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 국면이 전개되고 있지만 이건희 전 회장 퇴진 이후 이를 정면 돌파할 강력한 구심력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 와중에 전략기획실을 대체한 사장단협의회는 그 성격상 의사 결정을 내리기 힘든 조직이어서 그룹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2일 삼성에 따르면 최근 환율 폭등과 주가 폭락 등 금융시장이 요동치고 삼성전자를 비롯한 주력 기업들의 수익성이 곤두박질치고 있는데도 위기국면을 타개해나갈 그룹 차원의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계열사별로 위기의식을 주문하는 목소리들은 흘러 나오지만 그룹 차원에서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전략이나 방향이 제시되지 않고 있는 것.

◆사장단 협의회에선 어떤 일이…


"삼성이 장례식장 문화를 바꾼 것처럼 사회공헌 분야에서도 리드해나가야 한다"(A사장)"이번 베이징올림픽에서 삼성 지원으로 금메달을 딴 선수의 국위선양 효과를 계량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B사장)

지난달 27일 삼성 본관에서 열린 사장단협의회에서 나온 실제 대화 내용이다. 이날 회의는 사회공헌을 주제로 한 자유토론이었다. 많은 논의들이 진행됐고 분위기도 괜찮았다고 한다. 하지만 삼성 주변에선 요즘 같은 경제 난국에 사장들이 너무 한가한 내용의 회의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들이 나왔다.

전략기획실 해체 이후 지난 7월2일 출범한 사장단협의회는 경영전략 회의체라기보다는 계열사 사장단간 간담회 수준에 머물고 있다. 하계휴가로 휴회한 기간을 빼면 지금까지 고작 여섯 차례 모였을 뿐인데다 회의내용도 경영 현안과 동떨어져 있는 외부인사 초청강연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과거 삼성식 경영의 특징이었던 상시 구조조정과 경영진단 등과 같은 위기관리 체제에 대한 논의는 아예 의제에 오르지도 않았다. 협의회 산하기구인 투자조정위원회와 브랜드관리위원회도 아직 회의 일정을 잡지 못하고 있다. ◆복합위기 양상


삼성의 위기는 이미 국내외에서 △리더십 △성장동력 △브랜드 등이 동시에 무너지는 복합 위기의 양상을 띠고 있다는 것이 주변의 관측이다. 문제는 글로벌 경기침체와 국내 금융시장의 대혼란이라는 외부 악재와 맞물려 총체적 위기로 치달을 수 있다는 점이다.

과거 이건희 전 회장은 선택과 집중-준비경영-글로벌경영-창조경영 등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경영화두를 끊임없이 던지며 경각심을 갖도록 했다. 하지만 대다수 임직원들은 오너의 갑작스런 퇴진 이후 경영 스피드가 현저하게 저하되고 계열사간 지식과 정보,기술을 공유하는 역량도 눈에 띄게 약화됐다고 느낀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창조경영 이후 삼성을 이끌어가는 방침도 사라졌다"며 "직원들의 충성도도 예전같지 않고 일각에선 금전과 관련된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 양상까지 나타나고 있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추락하는 브랜드 가치


삼성은 지난 5월 브랜드 평가회사인 '밀라드 브라운 옵티마'로부터 브랜드 파워가 119억달러(58위)로 지난해 127억달러(44위)에 비해 13계단이나 주저앉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0년 이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던 브랜드 파워에 급제동이 걸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삼성이라는 브랜드는 일본 대중만화로부터 조롱을 받는 신세로 추락했다. 최근 발간된 일본의 인기만화 '시마 시리즈'에서는 삼성전자를 의미하는 '솜산(ソムサン)전자'가 음모와 부정을 일삼는 추악한 기업으로 그려졌다. 사정이 이런데도 브랜드 가치 하락을 걱정하는 목소리들은 그다지 들려오지 않는다. 한때 '명품' 대접을 받았던 애니콜의 브랜드 가치가 떨어져도 드러내놓고 지적하는 이들이 없는 게 삼성이 봉착한 현실이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