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규 "詩에서 배우고… 산문에서 해방감 느껴"

등단 50년 시인 황동규씨 산문집 '삶의 향기 몇점' 출간

"이상하다. 기억력은 현저히 줄었지만 상상력은 시에서도 산문에서도 줄지 않고 더 끓고 있음을 느낀다. "올해로 등단 50년을 맞은 시인 황동규씨(70)는 "왕성한 상상력은 시인에게 즐거움이자 고통"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연민과 황홀감을 남보다 더 진하게 느낍니다. 옛날에는 진입하지 못했던 틈새도 비집고 들어가게 됐습니다. 하지만 상상력과 반비례하는 기억력 때문에,잊어버리기 전에 글을 쓰느라 밤에 일어났다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거나 술의 힘을 빌어 잠을 청하는 날이 많아졌어요. 활발한 상상력은 자랑거리가 아니라 제 업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야겠습니다. "

칠순에 접어든 시인은 '시를 쓴다'가 아니라 '시와 대화를 나눈다'는 표현을 썼다. 시를 쓰다보면 시가 '저항하기도 해서' 쓰려고 했던 것이 바뀌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내가 시에게 배우고,시가 나에게 배운다"면서 "시와의 끊임없는 대화가 내 상상력의 원천인 듯하다"고 설명했다. 시와의 대화가 잘못될까봐 버리고 기피한 일도 많고,다른 사람과 다르게 행동한 적도 잦다고 했다. 황 시인은 미당 서정주의 추천으로 1958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데뷔작은 한국인의 애송시로 자리잡은 <즐거운 편지>와 <시월> <동백나무>.지금까지 시집 13권을 펴내며 활발한 창작활동을 펼쳐왔지만 그는 등단 50년이라는 사실에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가끔 내 생일도 잊어버리는 사람이에요. 올해로 등단한 지 50년 됐다는 사실도 남들이 알려줘서 알았습니다. 사실 등단 당시에도 '아,이제부터 시인이다'라는 생각은 별로 안 했습니다. 등단작이 고등학교 때 쓴 작품인 데다,고등학교 3학년 때 문과를 갈 때부터 제 자신이 시인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등단해서 제 작품이 널리 읽히게 됐다는 점은 좋았지만 말입니다. "

잘 알려진 대로 황 시인의 아버지는 <소나기>의 작가 황순원 선생이다. 그러나 가족은 문학의 길을 걷겠다는 그의 선택을 탐탁지 않아했다. "집안에서는 의대나 법대 진학을 원했습니다. 어머니는 영문과 진학을 반대했고,아버지는 중립이시긴 했으나 내심 제가 어머니 말씀을 따랐으면 하는 눈치였지요. 그러나 문학을 하지 않는 삶은 매력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도 상당히 반항한 셈입니다. "시인의 딸인 시내씨도 지난해 수필집 <황금 물고기>를 출간해 3대 문인으로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시인의 부모가 그랬듯이 그 또한 딸의 선택을 반기지 않았다. 그는 "최대 노력으로 최소 효과를 거두는 게 문학이라 딸에게는 문학을 안 시키려고 작심을 했었는데 세상 일이라는 게 참…"이라며 웃었다.

황 시인은 등단 50년과 칠순이라는 나이의 무게를 전혀 느끼지 않았다. 등단 50년을 기념하는 산문집 <삶의 향기 몇 점>(휴먼앤북스)까지 냈으니 충분히 자축했다는 생각이다. 인생과 문학에 대한 성찰,음악.술.여행 등 개인적 기호를 드러낸 이번 산문집에 대해 "산문은 시인의 해방이자 시인의 전신(全身)"이라며 만족스러워했다.

그는 <풍장>연작의 연속점에서 석가와 예수의 대화를 다룬 시편들은 계속 써나갈 생각이다. "난 계획이 없는 사람입니다. 내년에 시집 하나 내고,강한 술은 덜 마시고 약한 술로 바꾸겠다는 게 계획이라면 계획이겠습니다. 그리고 난 늙기에는 너무 늦었어요. 늙었으니 이런 일은 해야겠다,하지 말아야겠다 같은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으니 현재 삶을 끌고 가는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