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思考의 달인' 사마천이 알려주는 이기는 생각 그리고 우아한 처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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思考의 달인.사마천이 알려주는…2천년의 강의 김원중·강성민 지음/ 글항아리/ 407쪽/ 1만8000원
<사기(史記)>는 약 2100년 전의 역사책이다. 총 분량 130권에 글자 수는 무려 52만6500자나 된다. 다루고 있는 시간은 3000년 이상으로 중국사 전체의 5분의 3 이상을 차지한다. <사기>의 시간은 길고 공간은 무한히 넓다. 당시로서는 세계사였다. <사기>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평론가들은 '어지러운 책'이란 뜻으로 '난서(亂書)'라 불렀다. 하지만 이는 성급한 평가였다. 이 책은 사마천(司馬遷)이 130권 전체의 내용을 완전히 관통한 다음 아주 정교하고 치밀하게 짜 놓은 역사 퍼즐이다.
사마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관(史官) 직에 있으면서 역사책을 준비하다가 마흔 일곱의 나이에 뜻하지 않은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사형을 언도받는다. 그는 미처 끝내지 못한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사형보다 더 끔찍하고 치욕스러운 '궁형'을 자청한다.
그런데 궁형을 자청하기 전까지 1년 넘게 감옥에 있으면서 사마천은 자신이 구상했던 역사책의 내용을 완전히 바꾼다. 그 사이 인간의 본질,세상의 인심,권력의 실체,세계를 움직이는 힘 등 중대한 문제들에 대해 새로운 통찰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50만전의 돈만 내면 사형을 면할 수 있었지만 조정 대신들은 물론 친구들 중 누구 한 사람 도와주지 않았고,바른말로 부조리한 현상을 바로잡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사마천은 <사기>의 내용을 전면 수정해 부조리한 세태와 모순을 통째로 통찰하려 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사마천의 피를 먹고 완성된 역사책인 것이다. 피를 바쳐서 썼기에 등장 인물들은 하나같이 개성이 넘치고 살아 움직이는 듯 생생하다. 그것은 매력을 넘어 마력으로 우리를 끌어당긴다. 거기엔 고귀한 제왕에서부터 하잘 것 없는 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류의 인간이 망라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책이자 대단히 통속적인 책이다. 하지만 그 통속성은 고귀한 자들의 천박함과 천한 사람들의 고귀함이 교차되면서 짙은 여운을 남긴다. 우아한 통속성의 매력이라고나 할까?
이 우아한 통속성을 짚어 내고 거기에 먹기 좋게 양념을 치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다. 오랫동안 <사기>를 가까이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힘들다. 그런데 올해는 없나 보다 하던 차에 <2천년의 강의>를 만나게 되니 반가움과 기쁨,안도감이 교차한다.
오랫동안 <사기> 번역과 사마천 연구에 천착해 온 김원중 교수와 저술가 강성민씨가 함께 사마천의 사유 세계를 소개하고 있다. 주로 '열전(列傳)'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생각법을 관찰,비교,종합,직관,성찰,통찰 등 여섯 가닥으로 나누어 읽어 냈다. 사마천은 자신이 다루는 인물들의 참모습을 파고들었다. 그들의 고뇌와 음흉한 의도까지 마치 자신의 상황인 것처럼 심리 속에서 재연한 뒤에야 붓을 들어 써 내려갔다. 저자들은 바로 이 점에 착안하고 있다. 인물의 행동보다는 그 행동을 만들어 낸 '생각'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이란 얼마나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것인가. 저자들은 6개의 대분류와 26개 소분류로 '열전' 등장 인물들이 전개한 생각의 층차를 구별하면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른바 높은 신분으로 올라서고 위기를 극복하고 전망을 개척하는 '핵심 전략'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많이 뽑아 냈다는 점이다.
유세가(有勢家) 소진이 6개국의 재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논리적 사유를 넘어 상대방의 심리에 도사린 '불안 요소'를 극대화하는 심리 전략을 썼기 때문이라는 것,혁명의 성공을 위해서는 어떤 예외 요소도 둬서는 안 된다는 흉노 묵돌의 전략,한나라 고조의 천도(遷都)를 막아 사직을 지킨 신하 유경이 가짜 욕망에 빠져 허우적대는 왕에게 "대상에 매혹되지 말고 목적에 복무하라"고 충고한 것 등이다. 이런 식으로 저자들은 <사기열전>에 나오는 설득 전략과 이기기 위한 생각을 뽑아 냈다. 적대적인 사람에게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법,의심을 신뢰로 바꾸어 놓는 지혜,차선책을 최선책으로 만드는 절묘한 탁견부터 약소국의 위상학,원칙론자의 처세술,상인의 본질 등 전형적인 것은 물론 인간의 자존심과 단순성의 가치,운명과 인간 심리,자연스러움을 판단하는 기준 등 미묘하고 섬세한 부분에 이르는 내용들을 망라하고 있다.
복잡한 사회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우리 삶의 방향과 질을 결정하는 관건이 된다. 이것을 쉬운 말로 '처세(處世)'라 한다. 처세란 세상과 나와의 관계를 주관적으로 설정하는 고차원적인 삶의 방식이다. 그것은 삶에 대한 통찰과 세상에 대한 영감을 필요로 한다. 이런 점에서 <사기>는 더할 수 없이 귀중한 처세서이며,<2천년의 강의>는 그걸 먹기 좋게 요리하고 있다.
이 가을에 독자들은 한 권의 '우아하고 세련된 통속서'를 만난 셈이다. <사기>의 마력에 빠지기 전에 이 책의 매력을 먼저 만나 보길 권한다.
김영수 영산원불교대 교수ㆍ<사기의 인간경영법>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