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뉴스]19년전 떨면서 인터뷰한 故 최진실에 대한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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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 부터 20년이 조금 안되는 1989년.
저는 '경제신문'에서 비중이 크지 않는 부서인 문화부에서, 그것도 서른도 안된 나이의 막내인지라 중요도가 한참 떨어지는 영화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그런 까닭에 제가 쓰는 영화 관련 기사는 UIP 등 외국 영화배급사의 국내 진입 등 시장개방 문제나 산업적 영향 등이 주 테마였습니다.
영화 배우가 어떻다든지, 영화의 내용이 어떻다든지 하는 걸 써 봤자 지면에 반영되는 건 '하늘의 별따기' 였으니까요.
지금은 경제신문에서도 가끔 이런 기사 나오곤 하는데 아주 오래전 경제신문 영화담당 기자의 비애였습니다.당시 서울 충무로 대한극장 인근에 국내 최대 영화사 중의 하나인 태흥영화사(대표 이태원)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 회사의 여자 기획실장이 저와 같은 나이인지라 친하게 지내고, 자주 방문한 편이었지요. 솔직히 딴데서는 경제신문 기자라면 거들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 때 이태원 사장을 비롯해 임권택 감독, 정일성 촬영감독 등 어른들로부터 무협지같은 영화 인생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특히 당시 대부분의 영화담당 기자들은 40대나 50대가 주류를 이루던 시절이라 그 분들이 젊은 저와 얘기 나누는 걸 즐겨 했던 것 같습니다.
임권택 감독의 경우 과묵한 성격탓인 지 대화에서 그냥 웃기만 할 뿐 거의 말씀이 없었던 기억입니다.
하여튼 영화담당을 하면서 영화 배우에 대해선 거의 기사를 작성하지 못했던 그 시절, 제가 딱 한번 영화배우의 인터뷰 기사를 쓴 게 있는데요.오늘(2008년 10월 2일) 비운의 삶을 마감한 최진실씨가 주인공입니다.
200자 원고지로 3매도 채 안되고 사진은 우표 만하게 들어간 짧은 인터뷰 기사였는데 오래되어서 인지 인터넷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네요.
데스크에게 억지를 써 지면에 반영된 것이었고요.
인터뷰는 최진실씨가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란 삼성전자의 광고모델로 뜨고 영화 남부군에 출연한데 이어 영화에서 주인공역을 처음 맡은 게 배경이었고요.
영화는 '꼭지딴'이었습니다. 당시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많은 언론에서 기대주로 꼽았던 김XX씨의 감독 데뷔작이었습니다.
90년 7월에 개봉된 이 영화 극장에 내걸렸다가 며칠만에 간판을 내렸고 흥행에 참패했습니다. 완성도가 떨어지는데다 재미도 별로 없었다는 평가였기 때문입니다.
김XX씨는 이 작품으로 데뷔한 뒤 그 뒤에 작품을 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게 마지막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영화에서 처음 주연을 맡았던 고 최진실씨도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영화일 것으로 생각 됩니다.
최진실씨가 주연 영화배우로 나와 성공한 작품은 그 뒤에 제작된 '나의 사랑 나의 신부'인가 로 기억하고 있고요.
아무튼 1989년 후반쯤의 어느 날 오후.
여느 때 처럼 태흥영화사를 방문했지요.
마침 '꼭지딴'의 여주인공으로 픽업된 최진실씨가 그 곳에 온 모양이었습니다. 태흥영화사에서 마침 잘 됐다며 최씨와의 인터뷰까지 주선해 준 것입니다.
이 인터뷰를 지면에 반영할(기사화할) 자신은 없었지만 데스크와는 상의도 없이 제 마음대로 인터뷰를 일단 했습니다.
얼굴 예쁜 여자 배우, 그것도 한참 주가가 치솟고 있는 최진실씨를 만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스타를 만난다는 기대감으로 떨리는 감정을 억누르며 태흥영화사의 다른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지요.
매니저이던 배병수씨(94년인가 사망했지요)함께 등장한 최진실씨가 얼굴에 환하게 웃음을 띠고 들어와 악수를 청하는데 숨이 멎을 지경이었습니다.
청바지 차림에다 맨 얼굴로 등장한 최진실씨의 모습은 '청순 그 자체'라는 표현이 어울렸습니다. 또박또박 하는 말은 말 그대로 똑순이 이미지였고요.
인터뷰를 하는 제가 도리어 긴장을 풀지 못해 버벅거리고 주위에 있던 관계자들이 폭소를 터뜨리던 기억이 새롭네요.시간이 흘러 흘러 거의 20년이 다 되어 갑니다.
그 뒤로 최진실씨를 직접 본 적이 없습니다. 그의 인생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는 것을 언론을 통해서 접했고요.
더욱이 오늘 '슬픈' 소식을 접하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한경 블로그]
저는 '경제신문'에서 비중이 크지 않는 부서인 문화부에서, 그것도 서른도 안된 나이의 막내인지라 중요도가 한참 떨어지는 영화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그런 까닭에 제가 쓰는 영화 관련 기사는 UIP 등 외국 영화배급사의 국내 진입 등 시장개방 문제나 산업적 영향 등이 주 테마였습니다.
영화 배우가 어떻다든지, 영화의 내용이 어떻다든지 하는 걸 써 봤자 지면에 반영되는 건 '하늘의 별따기' 였으니까요.
지금은 경제신문에서도 가끔 이런 기사 나오곤 하는데 아주 오래전 경제신문 영화담당 기자의 비애였습니다.당시 서울 충무로 대한극장 인근에 국내 최대 영화사 중의 하나인 태흥영화사(대표 이태원)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 회사의 여자 기획실장이 저와 같은 나이인지라 친하게 지내고, 자주 방문한 편이었지요. 솔직히 딴데서는 경제신문 기자라면 거들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 때 이태원 사장을 비롯해 임권택 감독, 정일성 촬영감독 등 어른들로부터 무협지같은 영화 인생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특히 당시 대부분의 영화담당 기자들은 40대나 50대가 주류를 이루던 시절이라 그 분들이 젊은 저와 얘기 나누는 걸 즐겨 했던 것 같습니다.
임권택 감독의 경우 과묵한 성격탓인 지 대화에서 그냥 웃기만 할 뿐 거의 말씀이 없었던 기억입니다.
하여튼 영화담당을 하면서 영화 배우에 대해선 거의 기사를 작성하지 못했던 그 시절, 제가 딱 한번 영화배우의 인터뷰 기사를 쓴 게 있는데요.오늘(2008년 10월 2일) 비운의 삶을 마감한 최진실씨가 주인공입니다.
200자 원고지로 3매도 채 안되고 사진은 우표 만하게 들어간 짧은 인터뷰 기사였는데 오래되어서 인지 인터넷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네요.
데스크에게 억지를 써 지면에 반영된 것이었고요.
인터뷰는 최진실씨가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란 삼성전자의 광고모델로 뜨고 영화 남부군에 출연한데 이어 영화에서 주인공역을 처음 맡은 게 배경이었고요.
영화는 '꼭지딴'이었습니다. 당시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많은 언론에서 기대주로 꼽았던 김XX씨의 감독 데뷔작이었습니다.
90년 7월에 개봉된 이 영화 극장에 내걸렸다가 며칠만에 간판을 내렸고 흥행에 참패했습니다. 완성도가 떨어지는데다 재미도 별로 없었다는 평가였기 때문입니다.
김XX씨는 이 작품으로 데뷔한 뒤 그 뒤에 작품을 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게 마지막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영화에서 처음 주연을 맡았던 고 최진실씨도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영화일 것으로 생각 됩니다.
최진실씨가 주연 영화배우로 나와 성공한 작품은 그 뒤에 제작된 '나의 사랑 나의 신부'인가 로 기억하고 있고요.
아무튼 1989년 후반쯤의 어느 날 오후.
여느 때 처럼 태흥영화사를 방문했지요.
마침 '꼭지딴'의 여주인공으로 픽업된 최진실씨가 그 곳에 온 모양이었습니다. 태흥영화사에서 마침 잘 됐다며 최씨와의 인터뷰까지 주선해 준 것입니다.
이 인터뷰를 지면에 반영할(기사화할) 자신은 없었지만 데스크와는 상의도 없이 제 마음대로 인터뷰를 일단 했습니다.
얼굴 예쁜 여자 배우, 그것도 한참 주가가 치솟고 있는 최진실씨를 만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스타를 만난다는 기대감으로 떨리는 감정을 억누르며 태흥영화사의 다른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지요.
매니저이던 배병수씨(94년인가 사망했지요)함께 등장한 최진실씨가 얼굴에 환하게 웃음을 띠고 들어와 악수를 청하는데 숨이 멎을 지경이었습니다.
청바지 차림에다 맨 얼굴로 등장한 최진실씨의 모습은 '청순 그 자체'라는 표현이 어울렸습니다. 또박또박 하는 말은 말 그대로 똑순이 이미지였고요.
인터뷰를 하는 제가 도리어 긴장을 풀지 못해 버벅거리고 주위에 있던 관계자들이 폭소를 터뜨리던 기억이 새롭네요.시간이 흘러 흘러 거의 20년이 다 되어 갑니다.
그 뒤로 최진실씨를 직접 본 적이 없습니다. 그의 인생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는 것을 언론을 통해서 접했고요.
더욱이 오늘 '슬픈' 소식을 접하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한경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