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칼럼] 신자본주의 생존논리

미국 정부가 금융시스템을 안정시키기 위해 민간은행에 2500억달러를 투입키로 했다. 은행 부분 국유화가 시작된 셈이다. 미국이 패니메이 프레디맥 등 양대 모기지(주택담보대출) 회사 국유화 등 금융권에 쏟아부은 구제금융은 이미 1조달러에 육박한다. 자본주의 기관차 노릇을 해온 미국에서 벌어진 일이니 얼마나 당혹스러운 일일 것인가. 금융의 국유화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48년 공산당선언에서 공산주의로 가는 데 꼭 필요한 10단계 중 5번째로 꼽은 핵심 과제다. 마르크스가 무덤에서 웃을 일이라는 비아냥이 나올 만하다.

워낙 다급하게 이뤄진 조치여서 미국 정부가 민간 영역인 은행 경영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금융위기가 진정된 후 세계 금융시장의 판도가 어떻게 형성될지 현재로선 가늠하기 쉽지 않다. 월가는 일단 금융의 컨트롤타워가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고 있다. 금융 시장에서 정부 간섭을 꺼려온 미국 사회이지만 '큰 정부(Big Government)론'에 이견을 다는 목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다. 이유는 비용론에서 찾을 수 있다. 금융위기를 방치해 메인스트리트(실물경기)가 타격을 받으면 비용이 더 든다는 것이다. 대공황 때 금본위제를 지키기 위해 미국 등 각국 정부가 긴축을 했던 오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깔려 있다.

대공황을 연구한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이론 틀을 제시했다. 그가 기회 있을 때마다 "예전과 다르다","수단(tool)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 미국은 한동안 헬리콥터 프로펠러가 멈출 때까지 하늘에서 돈을 뿌려댈 게 분명하다. 미국 입장에서 보면 달러가 말라서 세계가 아우성인데 발권력을 동원해 '그린백'을 찍는 게 큰 문제가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금융위기로 미국 리더십은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체면이 구겨진 미국 주도의 초국적 금융자본은 더이상 설 땅이 없을 것 같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 체제로 세계 금융질서를 유지하기 어렵게 됐다. 대공황 때만 해도 미국은 세계 최대 채권국가였다. 뉴딜 정책도 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금 미국은 세계 최대 채무국이다.

정부 빚은 하루에 33억4000만달러씩 늘고 있다고 한다. 갚아야 할 빚이 10조달러에 달한다. 헤지펀드의 대가인 조지 소로스 회장도 "미국은 돈이 없기 때문에 예전처럼 힘을 행사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소비를 즐기는 미국인들은 지난 25년 동안 자기들이 생산한 것보다 매년 6∼7%씩 더 썼다는 것이다. 돈이 없는 미국이 예전처럼 지도력을 발휘해 세계 경제 불황을 치유하긴 어렵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불황이 확산되면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되고 국가 이기주의가 극성을 부리게 된다. 리더십을 상실한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은 어느 때보다 크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국제 금융질서가 들어설 때까지 우리도 나름의 생존논리를 찾고 국제무대에서 목소리를 내야 한다. 국제금융 정책의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 커진 만큼 필요하다면 정부 차원에서 전문 인력도 서둘러 보강해야 한다.

뉴욕 이익원 특파원 i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