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업계, 재고 늘어나 '속앓이'

두달전 주문한 고가원료는 쌓이는데
경기침체로 철강제품 값은 곤두박질
동국제강 등 '울며겨자먹기식' 감산

국내 철강업체들이 원자재 재고(在庫)로 속앓이를 하고 있다. 창고에는 2,3개월 전 주문했던 고가의 수입 원자재가 차곡차곡 쌓여가는 반면 글로벌 경기침체로 철강제품 가격이 급락세로 반전돼 수익성이 악화되고 있는 것.값싼 제품에 비싼 원료를 쓰는 셈이다. 후판(厚板)을 만드는데 들어가는 슬래브와 냉연강판에 사용되는 열연강판,스테인리스 제품의 주원료인 니켈 등이 여기에 속하는 대표적인 원자재다. 이런 악성 재고를 빨리 소진하고 싶지만 철강 수요가 크게 둔화돼 탈출구를 찾기가 쉽지 않다. 환율이 급등하면서 상황은 더 악화되고 있다.

◆급락하는 철강 원자재

철강업체들은 지난 7,8월 사상 최고의 가격에 원자재 계약을 맺었다. 혹시 더 오를지 몰라 물량도 넉넉히 주문했다. 원자재 가격 상승을 이유로 제품 가격도 몇 차례 올렸다. 그러나 두세 달 전 주문했던 물량이 속속 도착하고 있는 요즘 들어 상황이 급변했다. 후판용 슬래브 가격은 반토막이 났다. 지난 여름 t당 1200달러를 넘나들던 슬래브값은 최근 t당 500달러대로 주저앉았다. 철강업계에서는 다음달에도 t당 50달러가량 더 떨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브라질 호주 일본 등으로부터 슬래브를 수입해 후판을 생산하는 동국제강은 속이 바짝 타들어간다. 회사 관계자는 "현재 생산에 투입되는 원료는 7월에 계약한 것으로 단가가 t당 1200달러에 육박한다"며 "요즘 들어 슬래브값이 급락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원료는 분기 단위로 계약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예전에 들여 놓은 고가의 원료를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열연강판을 다듬어 냉연강판을 만드는 현대하이스코 동부제철 유니온스틸 등 냉연업체의 상황도 비슷하다. 스테인리스의 주 원료인 니켈 값도 지난 3월 t당 3만달러를 웃돌더니 요즘은 1만달러 선으로 가라앉았다.

◆감산이냐 가격인하냐원재료 값이 떨어지면서 철강제품 가격을 내리라는 시장의 압력이 커지고 있지만 철강업체들은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다. 고가의 원자재 재고를 모두 소진하기 전까지는 원자재 가격 하락분을 가격에 반영하기 어려워서다.

철강업체 관계자는 "지금 유통되는 낮은 가격의 원재료와 창고에 쌓아놓은 고가의 원재료를 섞어서 사용하는 '물타기'를 할 수도 있지만 이럴 경우 오히려 악성 재고를 소진하는 기간만 길어진다"고 말했다.

최근 급등한 환율도 철강업체들을 옥죄는 요인이다. 달러화로 표시되는 원자재 가격은 내렸지만 원화로 환산하면 되레 오른 경우도 적지 않다. 철강업체들은 기로에 섰다. 현 상황에서 빼들 수 있는 카드는 감산 또는 가격 인하 두 가지다. 국내 철강업체들은 일단 생산량을 줄여 가격을 안정시키는 쪽으로 기우는 모습이다. 글로벌 경기침체로 철강 수요가 줄어들고 있어 가격을 내려봐야 물건이 팔리지도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값을 떨어뜨릴 경우 비싼 재고를 잔뜩 쌓아놓고 있는 중간 유통업체들이 줄줄이 한계상황에 몰릴 수 있다는 것도 감산을 선택하게 된 배경이다.

업체별로는 동국제강이 포항에 있는 제2후판공장 보수작업을 진행,자연스레 감산대열에 합류한다는 방침이고 현대제철은 H형강 등 일부 품목의 감산을 검토중이다.

포스코는 지난 7월부터 시작된 스테인리스 감산 기조를 최소한 연말까지 유지하기로 했다. 대신 후판 등 철강제품 가격 인하 계획에 대해서는 일제히 "아직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물론 조선 건설 등 수요업체 쪽은 불만이 많다. 조선업체 관계자는 "그동안 가격 인상의 키워드였던 원자재 값이 하락한 만큼 현재의 철강제품 가격을 유지할 명분이 약하다"고 말했다.

안재석 기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