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설의 '경영 업그레이드'] 돌고 또 돌고

"백정이 왕을 위해 소를 잡았다. 손을 대고,어깨를 기대고,발로 밟고,무릎으로 누를 때마다 소의 살과 뼈가 푸덕푸덕 떨어져나갔다. 설겅설겅 칼소리가 운율에 딱 들어맞았다. "

장자(莊子)에 나오는 '백정의 도(道)' 얘기다.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재주를 가졌느냐는 문혜왕의 질문에 백정은 이렇게 대답한다. "저는 재주가 아니라 도로써 소를 잡습니다. 처음 제가 소를 잡았을 적에는 보이는 게 모두 소였습니다. 삼년 뒤에는 소로 보이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이제는 정신으로 소를 대하지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

요즘에는 잘 쓰지 않는 말이지만 소위 '도통하면' 이런 경지에 오를 수 있다. 그런데 이 백정이 소를 잡은 경력이 몇 년쯤 될까. 장자의 예화 속의 백정은 19년간 칼을 쓴 사람이다.

세계적인 경제 위기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리더십의 위기를 얘기한다. 리더십 위기라는 말을 쉽게 풀면 이렇게 다시 말할 수 있다. "믿을 만한 기관,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 "정부를 믿을 수 없다는 이런 지적에 수긍이 가면서도 빠뜨릴 수 없는 것은 그것은 우리 공직사회에 뿌리깊은 구조적인 문제라는 점이다. 우리 정부에 금융전문가,외환위기 전문가가 있는가. 20년 넘게 각국의 외환위기를 추적하면서 성공,실패사례를 수집해온 '도사'가 있는가. 한국 공직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 순환보직 풍토에서 과연 전문가가 자랄 수 있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공무원들과 일을 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잘 아는 일이지만 우리 공무원들의 직업인생은 돌고 도는 인생이다. 최근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보고에 따르면 임직 후 1년 이내의 전보율이 4~5급의 경우는 42%,고위공무원과 1~3급은 50%에 이른다. 1급 관리관의 경우는 75%가 1년 이내에 자리를 옮긴다. 하위직도 마찬가지여서 6급 이하 공무원의 경우도 3명 중 1명은 1년 이내에 자리를 바꾼다. 전체 직급을 통틀어 5년 이상 같은 보직에 있는 경우는 3.5%에 불과하다.

이런 현실에서 공무원집단이 새로운 정치집단을 과연 '아마추어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돌고 돌다보니 다른 데서 전문성이 생겨 쌀 소득 보전 직불금 같은 일반인들이 듣도 보도 못한 재테크에서도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것 아닌가. 경력은 화려하지만 전문성과는 거리가 먼 공무원들에게 '영혼'을 요구하거나 '도'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웃기는 얘기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와중에서도 혹 살아남은 도사 같은 전문가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을 알아보는 눈이 없으니 그마저도 힘을 발휘하기 어려운 구조다. 이유는 있다. 경찰 등 일부 대민부서의 경우는 한 곳에 오래 두면 부패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순환보직을 옳은 일로 보게 한 면이 있다. 그러나 사회가 성숙해가면서 이미 상당 부분 효용가치를 잃은 구시대적 논리일 뿐이다.

서울시에서 30년 넘게 일하다 퇴직한 하위직 전문 공무원의 부인이 전해준 말이다. "어느날 아침에 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나니까 이 양반이 옷차려 입고 나가는 거예요. 홍수 때 체크하던 곳을 다 돌고 왔다데요. 공직이 뭔지."

인사는 중요하지만,인사를 안 하는 것도 인사고 승진인사가 없는 것도 인사다. 그러나 이 위기 속에서도 공무원과 공공기관의 승진,전보 인사는 끊이질 않는다. 이런 문제를 지적해야 할 인사 전문 공직자는 과연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

한경 가치혁신연구소장 yskw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