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貨대출의 비극… '제2 키코사태'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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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1.서울 강남의 개업의 A씨.마흔도 안된 젊은 나이였지만 최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대형 의료기관에 밀려 병원 운영이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몇 년 전 운영자금으로 빌렸던 6억원가량의 엔화 대출금이 원ㆍ엔 환율 폭등으로 10억원을 넘어서면서 은행의 독촉을 견디지 못했다는 게 주변사람들의 전언이다.
#사례2.경기도 분당 중소업체 B사의 C사장은 2006년 2월 13억원의 원화대출을 엔화대출로 전환했다. 월 600만원의 이자를 350만원으로 줄일 수 있다는 은행 측의 설명에 별 망설임 없이 엔화대출에 손을 댔다. 그는 "최근 들어 갚아야 할 원금이 20억원으로 늘어났다"고 하소연했다. 18일 금융계에 따르면 6개 주요은행(국민 신한 우리 하나 기업 외환)의 10월 말 기준 엔화대출 잔액은 모두 1조939억엔(약 15조8943억원)이다. 한국은행이 연초 시중은행의 외화대출 상환기한을 연장해 주는 방안을 내놨지만 은행들은 원금 상환이나 추가 담보를 요구하며 대출자들을 옥죄고 있다.
엔화대출은 원ㆍ엔 환율이 100엔당 800원대 초반이던 2~3년 전 주로 고소득 자영업자나 중소기업체 등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일본의 제로금리 시절이다. 이른바 '엔캐리 트레이드 자금(일본의 저리 엔화 자금을 빌려 해외에서 운영하는 것)'에 국내 은행이 수수료와 이자를 붙여도 금리가 연 2%대에 불과해 인기가 높았다.
문제는 최근 원ㆍ엔 환율이 1400~1500원대로 급등한 것.엔화대출 원금이 졸지에 두 배 가까이 불어나면서 대출자들이 초비상 상태에 놓이고 말았다. 서울 압구정동과 강남역 주변 성형외과 피부과 치과들이 엔화대출 피해의 '직격탄'을 가장 집중적으로 맞았다. 2~3년 전 강남 개업의 가운데는 엔화대출을 끌어다 쓰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 지역에는 요즘 병원 급매물이 쏟아지고 있다. 330.58㎡(100평) 이상의 경우 최소 보증금이 2억원이라는 공식은 이미 옛말이 됐다. 최근에는 보증금을 절반 이상 깎아주겠다는 건물주까지 등장했다. 병원용 물건만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한 부동산업자는 "1년 전 2억원 정도의 인테리어 비용을 들여 개업한 의사가 시설물 양도비용으로 1억원만 받아도 좋으니 매물을 빨리 처분해달라고 부탁할 정도"라고 설명했다.
중소기업체들 역시 엔화대출의 피해에 노출돼 있다. 중소업체 사장인 D씨는 10년까지 장기연장이 가능하다는 은행 측의 설명에 2년 전 원ㆍ엔 환율이 840원일 때 연 2.2%의 금리로 11억원을 빌렸다. 하지만 최근 원ㆍ엔 환율 급등으로 원금이 17억원 정도로 불어난데다 한 달 이자도 280만원에서 541만원으로 늘었다. 은행들이 엔화자금 조달 비용이 상승했다는 이유로 금리를 연 7%로 올렸기 때문이다. D씨는 "은행들이 초반의 설명과 달리 대출연장이 불가능하다고 통보했다"면서 "키코에 엔화대출까지 겹치며 회사가 부도위기에 몰렸다"고 억울해했다. 일부 대출자들은 "위험 가능성을 은행이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며 은행들을 대상으로 법적대응에 나섰다. 은행 측은 이에 대해 "환율 변동에 따른 위험을 충분히 고지했다"고 반박했다.
이태훈 기자 bej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