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기다림

정소미 <더모델즈 대표 somi7@paran.com>

기다림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기도 하고,중요한 시험을 치른 뒤 성적을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기다림은 결과를 알 수 없기에 초조하고 불안하다. 그래서 인내를 필요로 한다.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기다림은 더욱 그렇다. 정해 놓은 답이 없고 상대의 의중을 확인할 길 없이 무작정 노력해야 한다. 그것을 견뎌내야 기쁨의 크기를 알 수 있다. 필자는 최근 그런 경험을 했다. 패션쇼 연출을 맡으면 수많은 고민을 한다.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을 아이디어,마케팅의 성공을 이끌어 낼 요소 등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100여명에 가까운 스태프를 일사불란하게 이끌어야 하는 게 패션쇼 연출이다. 특히 디자이너들마다의 컨셉트를 정확히 읽어내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 이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 쇼가 끝나고 나면 스태프와 클라이언트들은 "수고했다. 이번 행사는 멋있었다"며 서로를 격려한다. 그러면 긴장이 스르르 풀리고,다시 다음 행사를 준비할 힘을 얻는다. 지난 19년을 그렇게 달려왔다.

최근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10일 동안의'2009 S/S 서울 컬렉션'에 이어 2주 만에 'sfaa 컬렉션'을 진행하는 벅찬 일정을 소화해 내야 했기 때문이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식사할 때도 잠을 잘 때도 쇼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준비 과정이 길고 힘들었던 만큼 성공적으로 끝나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때였다. "수고했어.참으로 잘했어." 평소 존경하던 디자이너 한 분이 힘찬 박수와 함께 내게 칭찬의 말을 건넸다. 그 순간 지난 19년 동안의 힘들고 아팠던 기억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 분은 원래 엄격하고 말을 아끼셨다. 칭찬에는 인색하고 쓴소리를 많이 하던 분이었다. 컬렉션 프로젝트를 맡을 때마다 높은 산을 넘는 심정으로 견뎌 왔는데,그렇게 오랫동안 학수고대하던 그 어른의 칭찬은 지나온 날들을 되짚어 보게 해 주었다. 그동안 그 분의 쓴소리는 격려의 채찍이었다. 겸손을 배우게 하고,앞으로 넘어야 할 산을 이미 알고 있는 어른의 지혜가 담겨 있었다.

19년 만에 처음으로 이 분한테 칭찬을 듣고 보니 가야 할 길이 더 잘 보였다. 이제껏 지나온 산보다 더 많은 산이 내 앞에 놓여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 분의 칭찬은 행사에 대한 칭찬이기에 앞서 지난 19년 동안 말없이 달려온 내 삶에 대한 칭찬으로 들렸기에 가슴 벅찬 감동과 행복,자신감을 얻게 됐다. 인내의 선물은 그렇게 크고 멋있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