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代를 잇는 家嶪] (37) (주)영진 ‥기계 '기름때' 58년, 이젠 세계 수준 車 부품업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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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직후 만든 국수기계 '부르는게 값'
전자업 진출 세 번 실패도 이젠 추억…
현대차 협력사 되며 성장궤도 올라
지난 3일 대구시 달서구 월암동 성서공단에 있는 자동차부품 업체인 ㈜영진.육중한 프레스가 강판을 쿵쿵 내리찍으며 제품을 쏟아냈다. 자동차 시장 불황으로 적지 않은 부품 제조업체들이 휴·폐업 위기에 몰려 있지만 이곳 근로자들은 '세계적 수준의 부품을 동급으로는 가장 싼 가격에 만든다'는 자부심으로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이 회사는 자동차 부품들을 결속 또는 완충시켜 주는 브래킷류와 히터 모터 휠 등에 먼지나 이물질이 들어가지 않도록 막아 주는 커버류 등을 연 380억원어치(올해 추산) 생산한다. 400여개에 달하는 현대자동차의 1차 협력업체 중 현대차가 적극적으로 기술과 경영 기법을 지원해 주는 50~100위권 업체로 현대차와 유럽 자동차사로부터 해외 동반 진출을 요청받을 정도로 핵심 역량을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영진은 자동차부품 분야로는 2대째,기계 업종으로는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창업주 고(故) 서채봉 옹(1916~1989)은 일제시대 공업전문학교를 나왔다. 일류 엔지니어답게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삼성기계제작소를 세우고 국수 뽑는 기계를 개발,양산했다. 이 기계는 방방곡곡에서 주문이 밀려와 부르는 게 값일 정도였다. 한 대를 팔면 대구역 앞에 소 달구지를 대고 가마니 10개에 가득 담긴 돈을 담아 집으로 실어왔다고 한다. 이렇게 들어오는 수입이 1년이면 지금 돈으로 수백억원에 달했다. 그는 1960년대 후반 라디오 텔레비전 가전제품 등의 전자산업에 세 차례에 걸쳐 도전했다. 이게 성공했다면 지금쯤 삼성 LG와 같은 대기업 반열에 올랐을지 모를 일이지만 안타깝게도 모두 실패했다.
시련에도 불구하고 창업주는 산업 발전을 통해 애국한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1969년 당시 서울시 5급 공무원으로 잘나가던 장남인 종원씨(1937~2007)를 고향으로 불러들였다. 회사를 넘겨받아 키워 볼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서울 강남지역 개발 착수를 목전에 두고 막강한 권한을 쥐었던 아들은 주저했다. 안정적인 공무원을 그만두고 기름 냄새 나는 공장에 가기 싫어서였다. 결국 아버지의 강권을 못 견디고 석 달 만에 사장 자리에 올랐다. 7년간 공무원으로 지냈던 2대 서종원 사장은 목에 잔뜩 들어간 힘이 쉽게 빠지질 않았다. 취임 초기 근로자들과 어울리는 것부터 적성에 맞지 않았다. 월급 줄 때가 다가오면 은행에 가서 돈을 구해야 하는 게 끔찍했다.
게다가 재래식 기계산업은 한계에 봉착해 10년 가까이 이렇다 할 발전이 없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중 국내에서도 자동차 산업이 뜰 것이라고 판단,1978년 자동차부품 업체인 진양정밀을 세우고 업종 전환에 나섰다. 사업 초기만 해도 연결 고리나 완충재 같은 소품을 생산하는 데 그쳤다. 새 업종에 적응하느라 회사는 간신히 유지됐다. 1988년에 이르러서야 회사가 상당한 규모로 커지고 제품 수준도 올라가면서 영진으로 사명을 바꿨다. 그러나 이후 6년간은 투자 타이밍을 놓치고 숙련 기술자들이 빠져나가는 등 성장이 정체됐다. 1994년 현대자동차 1차 협력업체로 선정되면서 비로소 품질 확보와 기술 개발에 안정을 찾았다. 2002년엔 부도 직전의 프레스 전문 부품생산업체인 삼원공업㈜을 110억원에 인수·합병(M&A)했다.
2대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이듬해 경기가 나빠지고 나이 탓에 경영 감각도 떨어지자 그도 선친처럼 아들에게 경영 참여를 부탁했다. 이런 부름에 장남인 현 서승구 사장(42)은 고개를 저었다. "어린 시절 리어카 위에서 세 번이나 밤하늘의 별을 봤어요. 할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그 때마다 더 작은 집으로 옮겨야 했고 동네사람 보기 창피하니까 야반도주하듯 이사 간 것이죠." 이런 어릴 때의 기억은 서 사장에게 절대 제조업은 하지 않겠다는 잠재의식을 갖게 했다. 특히 서울 강남 지역에서 은행원으로 근무하며 자금난 때문에 돈을 구하러 자신을 찾아와 허리를 굽히는 중소기업 사장들의 애환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만큼 더욱 그랬다. 문제는 회사가 점점 위기 상황에 빠지면서 떠나는 직원들이 하나 둘씩 늘어났다는 점이었다. 자식 된 도리로서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회사로 출근하게 된 서 사장은 부친과 마찬가지로 공장 적응에 애를 먹었다. "처음에는 직원들과 아는 척을 않는다고 욕도 참 많이 얻어먹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저를 품질관리부에 보냈죠.고객의 쏟아지는 불만을 듣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내를 배웠습니다. "
서 사장은 차츰 변해 갔다. 주인의식과 해병대 정신(중위 전역)으로 재무장했다. 3년간 20만㎞를 주행할 정도로 영업 최일선에서 뛰었다. 직원들의 능력 개발을 독려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휴가제도를 운영하면서 유공자에 대한 포상도 아끼지 않았다. 무료 독감 예방접종 등의 배려에 직원들과의 관계도 돈독해졌다. 서 사장은 선친이 작고한 지난해 회사를 승계했다. 서 사장은 입사 당시 238억원에 불과하던 영진의 매출을 5년째인 올해 60% 늘어난 380억원으로 끌어올렸다. 로봇 도입,공정 자동화 등으로 원가를 40%가량 낮추고 품질 향상에 적극 나선 덕택이었다.
"똑같은 프레스로 부품을 찍어내지만 우리 회사가 만든 1000여종의 제품에는 '감성' 품질이 들어 있다고 해요. 금형이나 프레스를 다루는 능력이 뛰어나고 숙련된 기술자의 숨은 노하우도 담겨 있으니 기능과 내구성은 물론 외관과 고객의 느낌까지 좋죠.이런 장점을 살려 보다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을 만들겠습니다. "
대구=정종호 기자 rumba@hankyung.com
전자업 진출 세 번 실패도 이젠 추억…
현대차 협력사 되며 성장궤도 올라
지난 3일 대구시 달서구 월암동 성서공단에 있는 자동차부품 업체인 ㈜영진.육중한 프레스가 강판을 쿵쿵 내리찍으며 제품을 쏟아냈다. 자동차 시장 불황으로 적지 않은 부품 제조업체들이 휴·폐업 위기에 몰려 있지만 이곳 근로자들은 '세계적 수준의 부품을 동급으로는 가장 싼 가격에 만든다'는 자부심으로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이 회사는 자동차 부품들을 결속 또는 완충시켜 주는 브래킷류와 히터 모터 휠 등에 먼지나 이물질이 들어가지 않도록 막아 주는 커버류 등을 연 380억원어치(올해 추산) 생산한다. 400여개에 달하는 현대자동차의 1차 협력업체 중 현대차가 적극적으로 기술과 경영 기법을 지원해 주는 50~100위권 업체로 현대차와 유럽 자동차사로부터 해외 동반 진출을 요청받을 정도로 핵심 역량을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영진은 자동차부품 분야로는 2대째,기계 업종으로는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창업주 고(故) 서채봉 옹(1916~1989)은 일제시대 공업전문학교를 나왔다. 일류 엔지니어답게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삼성기계제작소를 세우고 국수 뽑는 기계를 개발,양산했다. 이 기계는 방방곡곡에서 주문이 밀려와 부르는 게 값일 정도였다. 한 대를 팔면 대구역 앞에 소 달구지를 대고 가마니 10개에 가득 담긴 돈을 담아 집으로 실어왔다고 한다. 이렇게 들어오는 수입이 1년이면 지금 돈으로 수백억원에 달했다. 그는 1960년대 후반 라디오 텔레비전 가전제품 등의 전자산업에 세 차례에 걸쳐 도전했다. 이게 성공했다면 지금쯤 삼성 LG와 같은 대기업 반열에 올랐을지 모를 일이지만 안타깝게도 모두 실패했다.
시련에도 불구하고 창업주는 산업 발전을 통해 애국한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1969년 당시 서울시 5급 공무원으로 잘나가던 장남인 종원씨(1937~2007)를 고향으로 불러들였다. 회사를 넘겨받아 키워 볼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서울 강남지역 개발 착수를 목전에 두고 막강한 권한을 쥐었던 아들은 주저했다. 안정적인 공무원을 그만두고 기름 냄새 나는 공장에 가기 싫어서였다. 결국 아버지의 강권을 못 견디고 석 달 만에 사장 자리에 올랐다. 7년간 공무원으로 지냈던 2대 서종원 사장은 목에 잔뜩 들어간 힘이 쉽게 빠지질 않았다. 취임 초기 근로자들과 어울리는 것부터 적성에 맞지 않았다. 월급 줄 때가 다가오면 은행에 가서 돈을 구해야 하는 게 끔찍했다.
게다가 재래식 기계산업은 한계에 봉착해 10년 가까이 이렇다 할 발전이 없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중 국내에서도 자동차 산업이 뜰 것이라고 판단,1978년 자동차부품 업체인 진양정밀을 세우고 업종 전환에 나섰다. 사업 초기만 해도 연결 고리나 완충재 같은 소품을 생산하는 데 그쳤다. 새 업종에 적응하느라 회사는 간신히 유지됐다. 1988년에 이르러서야 회사가 상당한 규모로 커지고 제품 수준도 올라가면서 영진으로 사명을 바꿨다. 그러나 이후 6년간은 투자 타이밍을 놓치고 숙련 기술자들이 빠져나가는 등 성장이 정체됐다. 1994년 현대자동차 1차 협력업체로 선정되면서 비로소 품질 확보와 기술 개발에 안정을 찾았다. 2002년엔 부도 직전의 프레스 전문 부품생산업체인 삼원공업㈜을 110억원에 인수·합병(M&A)했다.
2대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이듬해 경기가 나빠지고 나이 탓에 경영 감각도 떨어지자 그도 선친처럼 아들에게 경영 참여를 부탁했다. 이런 부름에 장남인 현 서승구 사장(42)은 고개를 저었다. "어린 시절 리어카 위에서 세 번이나 밤하늘의 별을 봤어요. 할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그 때마다 더 작은 집으로 옮겨야 했고 동네사람 보기 창피하니까 야반도주하듯 이사 간 것이죠." 이런 어릴 때의 기억은 서 사장에게 절대 제조업은 하지 않겠다는 잠재의식을 갖게 했다. 특히 서울 강남 지역에서 은행원으로 근무하며 자금난 때문에 돈을 구하러 자신을 찾아와 허리를 굽히는 중소기업 사장들의 애환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만큼 더욱 그랬다. 문제는 회사가 점점 위기 상황에 빠지면서 떠나는 직원들이 하나 둘씩 늘어났다는 점이었다. 자식 된 도리로서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회사로 출근하게 된 서 사장은 부친과 마찬가지로 공장 적응에 애를 먹었다. "처음에는 직원들과 아는 척을 않는다고 욕도 참 많이 얻어먹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저를 품질관리부에 보냈죠.고객의 쏟아지는 불만을 듣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내를 배웠습니다. "
서 사장은 차츰 변해 갔다. 주인의식과 해병대 정신(중위 전역)으로 재무장했다. 3년간 20만㎞를 주행할 정도로 영업 최일선에서 뛰었다. 직원들의 능력 개발을 독려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휴가제도를 운영하면서 유공자에 대한 포상도 아끼지 않았다. 무료 독감 예방접종 등의 배려에 직원들과의 관계도 돈독해졌다. 서 사장은 선친이 작고한 지난해 회사를 승계했다. 서 사장은 입사 당시 238억원에 불과하던 영진의 매출을 5년째인 올해 60% 늘어난 380억원으로 끌어올렸다. 로봇 도입,공정 자동화 등으로 원가를 40%가량 낮추고 품질 향상에 적극 나선 덕택이었다.
"똑같은 프레스로 부품을 찍어내지만 우리 회사가 만든 1000여종의 제품에는 '감성' 품질이 들어 있다고 해요. 금형이나 프레스를 다루는 능력이 뛰어나고 숙련된 기술자의 숨은 노하우도 담겨 있으니 기능과 내구성은 물론 외관과 고객의 느낌까지 좋죠.이런 장점을 살려 보다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을 만들겠습니다. "
대구=정종호 기자 rumb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