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집은 물건이 아니야!

박형준 <시인>

나는 집이라는 말의 어감이 좋다. '지이입' 하고 발음해보면, 어머니의 자궁에 감싸이듯이 안온함과 평화로움이 느껴진다. 현재 우리 경제는 글로벌 경기침체와 유동성으로 크게 흔들리고 있다. 잔잔한 강물에 가깝기보다는 파도치는 바닷물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 우리 사회가 처한 형국이다. 특히 부동산 가격 하락은 서민들에게도 큰 걱정거리를 안겨주고 있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부자들만의 일이라고 치부하기엔 개인 재산에서 주택이 차지하는 비율이 너무나 커져 있기 때문이다.

이윤 이외의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 현대판 소비자본주의 사회는 남과의 차별화를 꾀하는 교환가치만으로 경쟁을 부추겨왔고, 이에 따라 부동산도 재산 축적의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가장 값비싸게 장만한 것만이 삶의 존재 가치를 보증함에 따라 주인이 물건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주인이 물건을 섬겨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한 헛된 욕망이 쌓아올린 거품이 경기 침체로 꺼져감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소외와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에서 삶의 행복을 "건축물로서의 집이 아니라 거처로서의 집"에서 찾을 때, 인간은 교환 가치에서 벗어나 모든 것이 새로이 태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때문에 집에 새로운 장롱을 들여놓기보다는 낡은 장롱을 매일 정성스럽게 닦으라고 권한다. 살림살이의 정성이 깃든 집주인에 의해 아낌없이 사랑받는 물건들은 가족 구성원들의 추억이 어려 있기 때문에 아주 오래된 과거들조차 새로운 날로 이어주는 유대를 선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물건이 지닌 인간적 품위에 사랑의 눈길을 보낼 때 잠들어 있는 가구들은 깨어나, 그 집 전체가 정성으로 빛나는 집이 된다. 값비싼 물건들로 치장된 재테크 수단인 '건축물'로서의 집이 아니라 따스한 시선이 스민 하찮은 물건들로 채워진 '거처'로서의 집이 행복의 원천인 것이다. 바슐라르 식으로 말하자면, 매일 아침 집안의 모든 물건들이 우리들 자신의 손으로 다시 만들어져 우리들 자신의 손에서 탄생되어 나올 수 있다면, 설령 상대적으로 남보다 못한 집에서 살더라도 우리들 삶은 위대해진다.

미당 서정주는'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라는 시에서 거처로서의 집의 소중함을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전하고 있다. 미당은 어린 시절 어머니한테 꾸지람을 들어 따로 어디 갈 곳이 없을 때는 외할머니네 툇마루로 피신을 갔다고 한다. 처녀시절 너무나 많이 문질러서 거울처럼 반짝반짝 윤이 나는 툇마루의 그 '때거울'에는 어머니의 처녀적 소중한 추억이 간직되어 있기 때문에, 그곳까지는 어머니가 혼을 내려고 쫓아오지 않아서가 이유였다.

이런 이야기는 비단 미당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현재까지 도회지에서 집 한칸 장만하지 못하고 수십번을 이사를 다니면서 살지만, 내가 거쳐왔던 수많은 골목과 전세방이 어둠과 절망으로 채워져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령 나는 지금도 비가 온 후 반지하 방 창문 앞으로 쓸려온 흙더미에서 가녀리지만 생명력있게 피어난 꽃을 보며 절망조차 희망의 원동력으로 삼던 스무 살 시인 지망생의 푸른 저녁을 기억한다. 그 꽃이 감추고 있던 내밀함은 가난한 문학 청년의 내밀함으로 혼융되어 더할 수 없이 행복한 꿈을 꾸게 했던 것이다.

지난 겨울 귤 한 봉지를 손에 들고 늦은 밤 골목을 허적허적 올라가는 중년 사내를 본 적 있다. 눈 내린 골목에 남겨진 그의 발자국이 문득 서러워 나는 그 발자국에 내 발작국을 겹쳐 찍으며 골목 끝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그가 들어간 막다른 골목의 집 창에서 새어나오는 귤빛 같은 불빛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삶이 어려울수록 길 끝에는 따뜻한 집이 서 있다.